제주서 금강산까지 관광열차 만든 박기동 사장

관광열차를 생산하는 신기엔지니어링 박기동 사장.

어렵게 살아온 만큼, 욕심내지 않았다.

누군가 고된 삶을 살면 기꺼이 도왔다.

마음의 짐을 나누고 싶었다.

그래야 죽을 때 웃을 수 있을 것 같아서.

가족들과 직원들도 그의 뜻을 묵묵히 따랐다.

그래서 이들이 만든 ‘용인시 중동’이라고 적힌 관광열차는 희망을 실은 꿈이 되었다.

제주도에서 금강산까지 전국을 누비며 세계로 향하는 열차.

거기 한가운데 그가 서 있다.

▲ 제주서 금강산까지 관광열차 만든 박기동 사장
#정비공장 보조에서 사장이 되기까지

해방이 되던 해 박기동(61·기흥구 중동) 사장은 8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 시절 누구라도 그러했듯이 그의 집은 넉넉지 않았다. 배불리 먹고 마음껏 공부만 하는 모습은 어쩌면 꿈에서 가끔 볼만한 일이었을지 모른다.
용인고등학교를 마치고 일찍이 군에 입대한 그는 우연히 자동차 정비 일을 배울 기회가 생겼다. 열심히 했다.

‘1970년 3월4일’ 박 사장은 지금도 그날을 또렷이 기억했다. 군 생활을 마치고 사회에 첫발을 내딛은 첫날이기에 잊을 수 없는 특별한 날이 됐다. “정비공장 보조로 취직해서 꼬마봉급을 받고 일을 시작했죠. 월급이 4000원이었으니까 지금 돈으로 40만원정도 됐나.”

그는 낮에는 정비공장 보조로 일하고 밤에는 자격증 공부에 매달렸다. 2년 만에 1급 정비사 자격증을 따고 정비주임으로 승진했다.

“차도 많지 않았는데 최고 책임자 자리에 올라 3년만에 월급 8만5000원을 받았어요. 이정도면 그 때 대한민국 최고 월급쟁이였죠.” 그렇다고 자만하거나 게으름피우지 않았다. 1978년, 드디어 서울 문래동에 신기공업사를 차리고 25명의 직원을 둔‘사장님’이 됐다.

그 후에도 일을 가려하지 않았다. 견인차 운전도 마다하지 않았으니까.

돈 한푼 없이 태어나 정비공장 보조에서 공업사를 차릴 때까지 온갖 고생을 다해봤기에, 어려운 사람들을 돕는 일 역시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러웠다. 스크랩북에 정리된 장관표창 등 수백장의 표창장은 그의 삶을 대변했다.

박 사장은 자비를 들여 영등포 교도소 수감자들에게 15년 동안 정비기술을 가르쳤고 출소하면 기꺼이 데려다 직원으로 고용했다. 그러나 전과자와 한 일터에서 일할 수 없다고 항의하는 직원들의 반발은 생각보다 컸다. 따가운 눈총에 직원들 간 불화는 깊어갔다. 툭하면 회사 유리창이 깨졌을 정도였다.
“가난 속에서 불우하게 자랐다고 못난 인간은 아니며 죄를 지었다고 악인은 아니지 않습니까?” 박 사장은 직원들을 설득시키고 이해시켰다. 가깝게 지낼 수 있는 자리도 자주 만들었다. 직원들은 마음을 열고 박 사장과 함께 숨쉬었다.

“그 애들을 데려다 가리켜서 딴 정비공장으로 보내기도 하고 애들 낳고 잘 살아 지금도 만나죠.”

#용인에 공장 짓고 코끼리열차 첫 선

▲ 열차

아파트 개발로 신기공업사는 광명으로 옮겨가고 박 사장은 1995년 고향인 중동(엣 구성 중리)에 신기엔지니어링을 세웠다. 그 곳에서 박 사장은 대한민국의 첫 관광열차를 탄생시킨다. 누구나 한번쯤 타봤던 서울랜드 ‘코끼리열차’가 그의 첫 작품이다.

박 사장은 일본에서 처음 들어온 관광열차의 A/S가 안돼 멈춰 있는 것을 보고 “내가 기술자니까 국내 기술로 만들어보겠다”고 자신 있게 얘기했다.
코끼리 열차를 시작으로 제주도 여미지식물원, 인천대공원, 태백 용현동굴, 여수 동백열차, 독립기념관 등에 그가 만든 열차가 운행 중이다. 에버랜드의 사파리 버스도 그의 손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작년에 금강산에 ‘금강산 관광열차’를 보냈다. 남다른 기쁨이었다. 우리나라 전역을 달리는 ‘용인시 중동의 신기엔지니어링’열차가 북한까지 달려갔으니 말이다.

“용인사람이 우리 회사를 알아야 한다. 금강산에서 다니는 열차가 용인출신이니까. 열차 칸마다 기흥구 중동이라고 써 있어 용인사람들 중에는 반갑다며 전화를 걸기도 하죠.”

9월부터 일반 차량 진입이 금지되는 부산 태종대에도 신기엔지니어링 관광열차가 3대 대기하고 있다.

요즈음은 경기가 안 좋아서 전부 운행을 못하지만 현재 전국적으로 25대 정도 운행되고 있는 실정이다. 국내에서 유일하게 열차를 만들어 열차 수입은 전혀 되지 않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죽어도 이 회사는 계속 가야 한다고 말했다.

그가 우리나라에서 관광열차의 첫 페이지를 장식할 수 있었던 힘은 실력이었다. 노하우를 배우기 위해 세계 각국 안다녀 본 곳이 없었다. 하지만 사업을 하면서 안 하는 것이 있다.

여자 있는 술집 안가고, 커미션 안주고, 골프 안치고…사장이 하면 직원들도 닮아가고 그러면 신기엔지니어링이 무너질 수밖에 없다고 믿기 때문이다.
“별난 사람이죠? 이 나이에 골프 안치고. 사업가치고 큰 돈은 못 벌었죠.”
사업하면서 꼭 필요한 것을 안 하기 때문에 그의 사업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것은 박 사장이 한길로 걸어 갈 수 있었던 버팀목이었다. IMF때 1500만원을 건네면 일을 주겠다는 제의를 받았던 적이 있다. 그 자리에서 거절하고 직원들한테 미안하다고 빌었다. 월급도 제대로 주지 못할 만큼 어려웠는데 괜한 고집 때문에 직원들까지 힘들게했던 일이 있다. 그 때 거절해서 열차 1대를 유일하게 다른 사람이 만들었는데 그 열차는 오래 가지 못했다. 결국 신기엔지니어링 열차가 인정받는 계기가 되었고 주문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참…그 때 힘들었죠. 유서까지 다 써놓고 가족들과 제주도로 이별여행까지 다녀왔으니까요. 사람이 죽으란 법은 없나 봐요. 뜻하지 않게 아는 분이 보증을 서주셔서 구사일생으로 살아났죠.”

사람과의 인연이 그를 다시 살렸던 것이다. 여태껏 한 번 맺은 인연을 스스로 끊지 않았던 그에겐 인복이 따랐다. 그의 인정에 하늘도 감동했던 것일까.

#지금은 외도 중…더 많이 나누며 산다

박 사장은 사장님 같지 않다. 반바지에 티셔츠를 즐겨 입고 새벽 5시에 일어나 어김없이 학교 운동장에서 축구를 한다. 축구를 정말 좋아한다. 서울 양천구생활체육협의회 회장을 6년 동안 지냈으며 용인시생활체육협의회 고문과 동백축구회 단장으로 활동 중이다. 최근엔 서울시바르게살기협의회부회장을 맡았다.

“축구를 해서 젊은 것 같죠.” 웃음에 축구 사랑하는 마음이 고스란히 실렸다.

그는 남을 돕는 것도 소리 없이 쉬지 않는다. 그리고 고향에서 하고 싶었다. 해마다 쌀 50가마를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에쿠스 탈 돈 아껴서 성금도 기부한다. 명절이면 잊지 않고 과일박스를 들고 이웃들을 찾아간다.

요즈음 그는 외도 중이다. 열차 일은 서울대 경영학과를 나온 아들 성옥씨(33)와 직원들에게 맡겨두고 뜻하지 않은 기회가 찾아와 웨딩홀 경영자로 나섰다. 그는 “착하고 인정이 있어서 아들을 후계자로 합격시켰고 내 일처럼 일하는 직원들을 믿는다”고 했다.

부인과 큰 딸 재향씨(34)도 주말이면 예식장 일을 거둔다. 신경 쓸 것은 늘었지만 하루하루 나눔으로 채워가는 이 일이 즐겁기만 하다.

“난 행운아다. 좋은 사람들을 곁에 두었다. 죽는 날 그들을 생각하며 웃고 갈 수 있길 바랄 뿐이다.”

열심히 사는 사람에게 도움이 필요하면 주저 없이 돕겠다는 박 사장. “가진 것도 없는데 있는 채 하고 배운 것도 없는데 아는 채 하지 않겠다”는 소박한 마음은 후회 없는 삶을 살게 한다.

행운도 노력한 만큼 돌아오는 듯 했다. 수 십 년 동안 가족에 대한 사랑과 인생의 흔적을 남겨 온 메모장에 그는 또 써내려간다. 내일이 어떻게 쓰여 질지 모르지만 열심히 살고 있다는 오늘에 의미를 두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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