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역아동센터 숲속마을 지혜민학교에서 아이 돌보는 엄미경씨

웃음꽃이 활짝 핀 5월…신갈초에 새 보금자리

“헉헉, 선생님 책 더 가져올까요? 박스에도 책이 있는데요.”5학년 쯤 돼 보이는 두 아이가 이마에 땀을 뻘뻘 흘리며 책을 옮기고 있었다. 그래도 힘들지 않은 모양이다. 책꽂이에 책을 정리하러 가는 아이들.

지난 5월6일 개교 한 지역아동센터 숲속마을 지혜민학교(센터장 엄미경)는 신갈초등학교에 새 보금자리를 마련하고 그동안 사용하던 물건을 조금씩 날랐다.

▲ 지역아동센터 숲속마을 지혜민학교에서 아이 돌보는 엄미경씨
“무거운데 그만해. 조금 있다 아저씨가 옮길 거야.”아이들은 그제야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2005년 12월부터 신갈장로교회에서 생활하던 지혜민학교 아이들은 신갈초 황우백 교장의 배려로 독립적인 교실이 생겼다. 대형TV, 에어컨, 청소기 등은 물론 개인 사물함에 한없이 기뻐하는 아이들 모습은 봄햇살처럼 구김이 없었다.

특별활동 수업이 시작되기 전 출석확인도 하고 훌라후프도 돌리고, 운동장에 나가 놀고… 오후 4시 쯤 딸기쨈이 듬뿍 발린 빵과 시원한 우유로 배를 채우고 엄미경(40·구갈동)선생님과 사진을 찍겠다고 너도나도 모여드는 아이들, 친구 손을 잡고 지혜민학교를 찾은 어린 꼬마들이 이렇게 밝게 커 가는 중이다.

선생님, 우리 엄마…큰 딸 학원비로 센터 운영

그러니까 4년 전, 지혜민학교 엄미경 선생님은 개인적인 아픔을 지역의 아이들과 함께 이겨냈다. 그만큼 학교에 오는 이 아이들 모두 소중하다.

1997년 남편이 오토바이 교통사고로 머리를 다쳐 뇌수술을 받았다. 게다가 남편은 가해자였다. 빚을 얻어 장만한 집마저 병원비에 보태고 살길은 막막하기만 했다. 남편이 중환자실에서 일반병동으로 옮겨질 때 셋째 아이 임신 사실을 알게 됐지만 축복받을 임신소식은 세상에 비밀이었다. 소중한 생명을 힘들다는 핑계로 잃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배는 불러왔지만 사람들은 쉽게 눈치 채지 못했다. 오직 남편이 건강을 되찾길 바라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견뎌냈다.

그러나 남편의 수술 결과는 좋지 않았다. “뇌 기관 중 인지 능력을 다쳐서 자신의 삶의 위치와 책임이 무엇인지 모르게 된 남편, 집안 사정이 어찌되건 자고 싶을 때 자고, 먹고 싶을 때 먹어야 하는 어린 아이처럼 먹고, 난폭해지는 남편, 많이 힘들었죠.”

엄 선생님은 부천에 살았지만 고향인 신갈에 무작정 왔다. 그리고 친정으로 들어가 셋째 아이를 낳았지만 보름에 200만원이 넘는 병원비를 감당하기 힘들었다. 또 뱃속으로 낳은 세 딸을 버릴 수 없었다.

세 아이를 보육시설에 맡기고 돈을 벌어봐야 보육료를 감당하기에도 부족했다. 남편 병 수발과 아이들을 돌보는 일이 고됐다. 다들 그에게 “한 쪽을 포기하라”는 말 만했다. 하지만 그는 남편과 헤어져야 된다는 것보다 이 생활을 바꿔야 한다는 생각이 더 커 남편, 자식 모두 포기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뾰족한 대안도 없었다. 유흥업소 전단지를 틈틈이 돌리면서 동사무소에 기초생활보호대상자 신청서를 내고 남편 병원비와 아이들 보육료도 감면받았다. 직장에도 입사했지만 정말 쉽지 않은 삶의 연속이었다.

“하루 종일 일하고 오면 세상모르고 행복하게 자고 있는 남편과 고추장만 넣어 밥 비벼먹어 입 주변이 고추장 물로 벌겋게 물들어있는 아이들, 말라비틀어진 붉은 밥풀 데기가 붙어 있는 대접이 방안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저녁밥까지 해 놓은 것을 다 퍼먹고도 나만 보면 배고프다고 칭얼대는 아이들….”

엄 선생님은 불과 몇 년 전 아픔을 고스란히 기억하면서 5년을 그렇게 살았다. 그러면서 신앙에 믿음을 갖고 한국임상목회상담훈련원에서 교육을 받았다.

“2003년 신학을 배우면서 남편이 제자리로 돌아오는 거예요. 신앙적인 믿음으로 밖에 해석이 안돼요.”

강남마을 임대아파트 살고 있는 엄 선생님은 남편이 설비일을 하며 번 돈으로 생계를 유지고 있다. 그리고 큰 딸 지수의 학원비로 지혜민학교를 시작했다.

“큰 애 키우는데 매달 학원비로 50만원씩 들어가더라고요. 제 형편에 학원을 보내면 연간 600만원을 빚지게 되는데 차라리 그 돈으로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돌보고 제 딸도 같이 키워야겠다고 생각했죠.”

엄 선생의 세 딸 지수, 혜수, 민수도 학교가 끝나면 지혜민학교에 온다. 이름 역시 세 딸의 이름을 붙여 지은 것이다. 그만큼 책임감을 느낀다는 엄선생님. 그래서 그는 지혜민학교 선생님이면서 30여 명의 엄마다.

“엄마, 아빠가 집에 올 때까지 학원을 다니는 것 역시 아이들을 방치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요. 이 곳은 도움이 필요한 아이들을 사랑이라는 울타리 안에서 보살피는 것이죠.”

지혜민학교 아이들은 구갈, 보라, 신갈동에서 온다. 학교가 끝나면 빠지지 않고 오는 아이들, 주로 친구의 친구 손을 잡고 오는 아이들이 많다. 이 이아들 가운데 20여 명은 저녁을 먹고 밤 9시가 돼야 집으로 돌아간다. 특별활동 수업 시간 후 교회에서 저녁을 먹으면 아이들은 책도 읽고 엄 선생님에게 친구, 학교 얘기를 시시콜콜 털어놓는다. 마음을 연 아이들을 보며 한 없이 기쁜 엄 선생님은 “이 일이 체질인가 봐요. 세 딸 키우는 것보다 30명 키우는 게 쉽다”고 말한다.

▲ 숲속마을 지혜민학교 아이들과 함께
“숲속마을에서 우리 아이들 잘 돌볼 겁니다”

엄 선생님은 아이들을 어떻게 키울 것인가 늘 고민한다. 할머니 손에서 자라거나, 한부모 밑에서 자라거나, 소득이 적은 맞벌이 부모님 밑에서 자라거나 엄 선생님에게 30남매는 모두 똑같은 자식이다. 그래서 그 아이들에게 엄마처럼 따뜻한 밥을 먹이고 좋은 교육도 받게 하고 싶다.

“가난하더라도 우리 아이들, 우리의 미래는 어른들의 진심어린 보살핌을 받아야 해요. 숲속마을 아이들이 차선인 것이 싫어요. 더 아끼고 정성스럽게 돌볼 거예요.”

아직 부족한 것이 많다. 아이 잘 키우겠다는 부모 마음 끝이 없는 듯. 아이들이 안전하게 숲속마을을 오갔으면 좋겠고 밥도 교실에서 먹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세 딸과 함께 이 땅에서 살게 될 아이들이니까 엄 선생님은 좀 더 따뜻하게 이 아이들을 품고 싶을 뿐이다. 우리 엄마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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