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이 한창 무르익어야
뽀송뽀송 솜 가득한 털옷 입고 삐죽거리며 올라오는 꽃
꽃샘추위라고는 남아있진 않은 봄이라야
하얀 솜털사이로 보랏빛을 살며시 내어놓는 꽃
할미꽃 질 무렵 할머니 심심할까 양지바른 무덤가에 피어나는 꽃
산골 살던 할머니 바다내음, 비린내 그리웠나
백두옹 한창인 할머니 무덤가에
도깨비방망이 닮은 보랏빛 꽃방망이 꼿꼿하다
-자작시 : 조개나물
조개나물은 바다와 아무 상관이 없는 양지바른 동산에서 자라는 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꽃의 활짝 핀 모양새가 입을 벌린 채 부드러운 살을 내놓은 조개를 닮아서 그런 이름이 붙여졌나 봅니다. 산과 바다, 어쩌면 전혀 다른 존재인 것 같지만 그들은 함께 어우러져서 아름다움을 만들어 갈 줄 압니다. 그 비결은 서로의 다름을 인정해 주고 자기다움을 지켜가기 때문일 것입니다.
서울 근교의 자그마한 야산, 그 곳에도 꽃은 피어있을 것이라는 믿음은 있었지만 조개나물을 만날 것이라고는 생각도 못했습니다. 무덤가에는 어린 시절 보았던 그 모습 그대로 할미꽃이 잔뜩 허리를 숙이고 피어있었고 백발성성한 백두옹이 하나 둘 보이기 시작합니다. 그 가운데 솜털 옷을 입고 꼿꼿하게 올라오는 것들이 있었습니다. 도감에서만 보아왔지만 그것을 보는 순간 '조개나물'이라는 것을 알고는 너무너무 반가웠습니다.
진달래도 빛이 발하고 개나리의 노랑물결도 한풀 꺾였습니다.
벚꽃은 꽃눈이 되어 내리기 시작하고, 목련도 어느 새 순백의 색깔을 잃어버리고 흙으로 돌아가고 있습니다. 사계절 중에서 봄처럼 천천히 왔다가 빨리 가는 계절은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도 솜털을 입고 있는 작은 꽃들, 활짝 핀 꽃들을 만나지 못하면 또 찾아오면 되겠지만 그래도 기왕 그 흔적을 보았는데 어딘가에는 부지런한 놈이 피지 않았을까 두리번거렸습니다.
아, 고개를 들어 좀 더 햇살이 잘 드는 무덤가를 바라보니 보랏빛의 향연이 펼쳐졌습니다.
이렇게 생긴 꽃이구나 바라보다 도깨비방망이를 떠올렸습니다. 작은 꽃방망이를 치면 금은대신 이 세상에 필요한 오염되지 않은 아름다운 단어들이 튀어나올 것 같습니다. 예를 들면 평화, 사랑, 소망 같은 단어 같은 것들 말입니다.
사랑을 가장 많이 말하는 곳에 사랑이 없고, 평화를 수호한다는 명목으로 전쟁을 일으키는 세상입니다. 그래서 소망을 잃어버리고 살아가지만 그래도 소망이 있어서 살아가는 세상입니다.
연록의 이파리가 올라오는 산을 바라보았습니다. 진달래, 벚, 복숭아꽃과 새록새록 올라오는 새순들이 어우러져 한 폭의 그림을 만들어갑니다. 아무리 담아보려고 해도 그 넓고 깊은 자연을 담을 수가 없어 그냥 마음에 담아둡니다. 간혹, 이렇게 마음에 담아두는 것이 더 깊은 여운을 남길 때가 있거든요.
무덤가에 흐드러지게 핀 꽃, 언젠가 분명히 보았을 그 꽃인데 이제야 보이고 이제야 이름을 불러줍니다. 아무리 소중한 것들이 곁에 있어도 보지 못하고 지나칠 수 있는 것이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내가 힘들다고 불평하는 것들 속에 들어있는 소중한 것들, 소중하기 때문에 불평하면서도 끝까지 가지고 살아가는 것들을 좋아해야겠구나, 사랑해야겠구나, 그래야 나도 살고 그것도 살겠구나 하는 깨달음을 얻습니다.
함께 동산에 올랐던 누님은 세상에 이런 꽃도 있었냐고 신기해합니다. 유방암수술과 항암수술을 마치고 방사선치료를 하고 있는 누님, 머리카락 하나도 남지 않아 마음이 아팠는데 이제 다시 머리카락이 올라옵니다. 까까머리 중학생 같은 누님의 머리를 보면서 왜 그렇게 감사한지요. 저렇게 머리카락이 올라온다는 것은 회복되고 있다는 증거니까 너무 고맙고 감사했습니다.
죽음의 고비를 넘기니 세상이 달라 보였다고 했습니다. 어쩌면 지금 피어있는 저 꽃을 내년에는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세상의 모든 꽃들이, 모든 사람들이, 동물들이 다 사랑스럽게 느껴진다고 했습니다.
큰 산을 넘고 나니 작은 산들, 그 전에는 죽기 살기로 악착같이 매달렸던 것들이 왜 그렇게 속절없어 보이는지 모른다고 했습니다. 도깨비방망이를 닮은 조개나물, 그 꽃방망이가 한 가지 소원을 들어준다면 어떤 소원을 빌으시겠습니까?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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