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순 치매노모 돌보는 신희철씨

“주방으로 들어간 엄마는 냉장고도 뒤지고 수저통도 이리저리 뒤져가며 밥상을 차리기에 분주했다. 그러나 엄마는 무엇을 어찌해야 할지 허둥대기만 할 뿐 식탁에는 수저와 밥 한 공기만 놓여 있었다. 와락 눈물이 났다. 따뜻한 밥과 내가 좋아하는 반찬을 차려놓고 딸을 기다리던 ‘나의 엄마’는 이제 없었던 것이다. 과거와 현재를 넘나들며 끊임없는 상상의 세계를 혼자 헤매는 외로움에 지친 한 ‘아이 노인’만이 나를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 팔순 치매노모 돌보는 신희철씨와 어머니.
사십이 넘은 미혼의 딸을 뒷바라지해 주던 어머니가 어느 날 갑자기 쓰러졌다. 3일 밤낮을 깊은 잠에 빠져 있더니 드디어 어머니가 눈을 떴다. 그러나 그는 이전의 어머니가 아니었다. 사지는 굳어 있고, 정신은 차렸지만 현실을 분간하지 못했다. 어머니는 다섯 살 배기 어린 아이로 돌아가 있었다. 신희철씨(47·기흥구 상갈동)의 어머니에게 치매는 그렇게 찾아왔다.

2000년 3월 루이소체치매에 걸린 어머니 김순례씨(80)는 대소변도 가리지 못하고 6남매 자식들의 얼굴마저 알아보지 못했다. 옷을 갈아입히려고 하면 난폭해졌고 집에 가야한다며 한밤중에 식구들을 모두 깨워놓았다. 어머니는 하루 종일 온갖 가재도구와 잡동사니를 넣은 보따리를 쌌다. 퇴근한 딸은 매일 밤늦도록 어머니의 보따리를 풀어야 했다.

신희철씨는 대기업의 잘 나가던 직장을 그만두었다. “이제는 내가 엄마를 돌봐야 할 때가 온 것”이었기 때문이다.

어머니가 3일간 혼수상태에 빠져있을 때 그는 줄곧 엄마에게 용서를 빌었다. 한 번도 엄마에게 애정을 표현하지 않았던 무뚝뚝한 딸, 분주한 삶에 얽매여 홀로된 엄마의 쓸쓸한 노년을 외면했다는 자책감이 몰려왔다.

“엄마에게 못 되게 굴었던 내게 속죄할 수 있는 시간을 달라고 그때 빌고 또 빌었어요. 따뜻한 말 한마디 건넬 수 있는 시간만이라도 달라고. 엄마는 지금 이렇게 살아계셔서 내게 그 잘못을 빌 수 있는 기회를 주고 계신 거예요. 엄마가 곁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는 감사해요.”

그는 스스로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그때부터 글쓰기를 시작했다. 인터넷신문 오마이뉴스에 치매어머니와 사는 이야기를 올렸다. 주변의 많은 호응이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는 어머니를 향한 자신의 마음을 다잡기 위한 방편으로 지금까지 글쓰기를 멈추지 않고 있다.

# 치매엄마에 대한 사랑 글로 표현

그가 쓴 60여 편의 글은 지난해 초 ‘다섯 살 배기 딸이 된 엄마’라는 제목의 책으로 출간됐다. 그는 또 KBS 제3라디오의 ‘출발 멋진 세상’에서‘치매부모와 잘 지내기’라는 코너를 1년간 맡아오고 있다.

“정말 신기하게도 사랑은 표현하면 할수록 그 마음이 증폭돼요. 글쓰기를 하면서 엄마에 대한 사랑을 표현하다보니 엄마가 더 사랑스럽고 예뻐지는 거예요. 예쁘니까 그만큼 표현도 더 많이 하게 되구요.”

더욱 놀라운 것은 그가 어머니에게 애정과 관심을 기울이면서 어머니의 치매증세도 상당한 호전을 보였다는 것이다.

인터뷰 도중에도 어머니는 딸의 관심을 끌기 위해 끙끙 앓는 소리를 낸다. “엄마, 조금만 있다가 놀아줄게.” 딸은 어머니의 손과 뺨을 연신 어루만지며 달랬다.

“치매환자는 난폭하고 위험하다는 선입견을 버렸으면 좋겠어요. 가족들이 초기대응을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해요. 치매환자를 한 인격체로 대하고 따뜻한 사랑을 보여줄 때 환자의 태도도 점차 유순해진다는 것이 엄마를 통해 배운 경험이에요.”

치매환자의 수치심을 유발하는 강제적인 행동이나 가족들의 회피, 자포자기는 오히려 상황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는 것. 오히려 현실을 받아들이고 ‘환자에게 익숙해지는 것’이 서로가 불행해지지 않는 방법이다.

치매노모와 사는 것이 신희철씨에게도 그렇게 만만한 일은 아니었다.

어머니 곁에는 항상 누군가가 함께 있어야 하는데, 처음에는 3명의 자식들이 그 짐을 나누어졌지만 나중에는 2명이, 그리고 지금은 다섯째 자식 신희철씨 홀로 그 몫을 도맡았다.

“긴 병에 효자 없다”고 시간이 갈수록 어머니는 자식들에게 버거운 존재가 되어 갔다. 2년 전 신희철씨가 화훼사업을 시작하면서 어머니는 낮 시간 동안 형제들이 번갈아 가며 돌봐주었다.

그러나 언제부턴가 어머니 홀로 지내는 시간이 많아지기 시작했다. 밥이며 과일이며 다 챙겨주고 문단속까지 한 후 출근했지만 갑자기 집을 나가 버린 어머니, 밤새 헤맨 끝에 파출소에서 어머니를 찾아낸 그날 그는 통곡을 멈출 수 없었다.

게다가 아무도 집에 없는 사이 화장실에 들어간 어머니가 변기와 휴지걸이 사이에 끼어 다섯 시간 동안 방치된 사건을 겪고 나서 그는 어머니를 외면하는 형제들에게 더 이상 기대지 않기로 했다. 낮에 어머니를 돌봐 줄 도우미를 찾아 나섰지만, 그러나 그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모녀는 이제 단 둘만 남겨졌다. 딸은 어머니를 휠체어에 태워 함께 출근하기 시작했다. 사무실로 백화점으로 농장으로 돌아다니며 어머니를 곁에 둔 채 새벽까지도 일해야 했다.

“어떤 날은 엄마가 아침에 일어나시질 못하는 거예요. 그러면 주무시는 거 보고 출근했다가 점심때 고속도로를 달려서 집에 들어와 식사하고 엄마랑 또 일하러 나가고 그랬어요. 나중에는 과로에 몸살이 겹쳐 엄마가 입원까지 했는데 정말 미안하고 마음이 많이 아팠죠.”

보름동안을 고생한 끝에 다행히 도우미를 구할 수 있었다.

▲ 지난 3월26일 섬진강변에서 열린 마라톤대회에 출전한 모녀. 이날 대회에서 신희철씨는 어머니 김순례씨의 휠체어를 밀고 5km구간을 완주, 메달을 따냈다.
엄마와 딸은 이제 사업적인 일만 빼고는 늘 함께 한다. 엄마가 다니고 싶어 했던 교회도, 산책길도, 여행도, 맛있는 음식점도 둘이 같이 간다. 어머니가 아프시기 전에는 전혀 없었던 일이다. 최근에는 오마이뉴스에서 주최하는 ‘섬진강 강사랑 마라톤대회’의 5km구간에 출전, 휠체어를 타고 밀며 함께 완주했다.

# 둘이 함께하는 삶, 주변과도 나눠

“지난한 세월을 살아온 엄마를 보면서 여성의 삶에 대해, 늙음에 대해 많은 것을 느껴요. 치매 가족이 겪는 고통과 그들의 인권도 돌아보아야겠지요. 그러나 치매노인들의 인권도 존중해 주었으면 합니다. 치매환자에게는 가족들의 지속적인 관심과 배려와 보호가 필요해요. 그것으로 치매를 낫게 할 수는 없지만 상황을 악화시키는 것은 분명 막을 수 있어요.”

신희철씨는 오는 4월12일 오후 2시 서북부장애인복지관에서 ‘늙음이 행복한 삶’을 주제로 강연한다. 그는 이 같은 강연을 통해 치매가족간 네트워크를 만드는 한편,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치매예방과 대처법을 간접경험 할 수 있는 자원봉사활동이 활성화되기를 바라고 있다.

자식이라고 해서 누구나 부모의 치매를 너그럽게 받아들이지는 않는다. 치매까지도 감쌀 수 있는 사랑의 힘은 어디서부터 오는 것일까. 신희철씨의 글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사람들은 내게 ‘효녀’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렇게 나를 칭찬하는 사람들은 내가 지난 세월, 엄마에게 얼마나 모질고 차갑게 대했는지, 엄마가 그로 인해 얼마나 많은 상처를 받았는지 알지 못하기 때문일 것이다. 엄마가 나 때문에 받았을 그 많은 상처들을 생각한다면 난 아직도 속죄의 갚음을 더 해야 할 것인데 ‘효녀’라는 말은 가당치도 않다.… 자식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사십년을 낳아 키워준 엄마에게 내가 그 몇 년의 보살핌을 한다한들 그것이 대단한 일일 수 없다. 난 엄마가 돌아가시기 전에 엄마가 내게 그 오랜 기간 베풀어 주신 사랑을 모두 돌려 드리고 싶을 뿐이다. 다행히 돌아가신 뒤 후회해봐야 아무 소용이 없는 일이라는 것만은 미리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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