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해 영종도 백운산 용궁사
우리네 일상에는 눈에도 보이지 않고 촉감으로도 드러나지 않는, 가랑비처럼 미미하게 다가오는 느낌이 참 많으며 이 또한 무시되거나 방치되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질풍노도의 격한 감정변화나 박장대소할 만큼 기쁜 일, 통곡할 만큼 슬프거나 억울한 일에서 발생하는 충격적 느낌이야 다가옴과 원인이 뚜렷하니 모든 게 분명합니다. 모든 게 분명하니 그 원인과 해결책도 쉽게 찾거나 해결할 수 있습니다. 배신을 당해 분노한다면 그 분노의 원인은 배신에 있고, 누군가 죽어 통곡한다면 그 통곡의 원인은 죽음에서 비롯됐다는 걸 분명히 알기에 답답하지도 않고 혼란스럽지도 않습니다.
가랑비에 젖지 않는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완벽하게 방수를 하는 방법도 있고 아예 비 오는 날엔 밖을 나가지 않는 방법도 있습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현실적이지 못합니다. 한평생을 살면서 어찌 완벽할 수만 있으며, 피해 다닐 수만은 없기 때문입니다. 좀 우스운 이야기 같지만 옷 젖는 게 문제라면 옷 벗어 싸들고 발가벗은 채 가랑비를 지나가면 됩니다. 그나 이 또한 쉬운 일이 아닙니다. 이목이 있고 감출 게 있는데 어찌 백주에 알몸을 드러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의 일상에 다가오는 미미한 감정, 느낌도 이와 마찬가지입니다. 완벽하게 피하거나 막을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고 모든 감정 다 드러내고 미친놈처럼 살아갈 수도 없습니다. 그러기에 우린 그 해결책을 찾아야 합니다.
햇살에 드러내듯 그렇게 드러내면 젖어든 가랑비도, 번민의 갈등도 뽀송뽀송 말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하려면 마음이 맑고 감정이 순수해야 합니다. 먼지 낀 유리로 창밖을 볼 수 없듯 번뇌 가득한 마음으론 느낌도 감정도 제대로 읽지를 못하기 때문입니다. 마음을 맑게 하고 감정을 순화시키기 위해서는 '어떻게'가 관건입니다. 광대가 춤을 추고 무당이 굿을 하는데도 때와 장소가 있고 판이 벌어져야 합니다. 그러기에 마음을 맑게 하고 감정을 순화시키는, 그 때와 장소로 필자는 조용한 산사를 찾습니다. 산사엘 가면 햇살이 있고 바람도 있습니다. 음습한 마음 말려줄 햇살만 있는 게 아니라, 그 속도를 더해줄 바람까지 불어주니 마음 닦고 감정 추스르는 데는 산사가 제격입니다. 너무 미미해 감지하지 못한 게 아니라 심안이 둔감해 느끼지 못한다는 게 솔직한 표현입니다. 마음이 맑아지면 그동안 감지하지 못했던 그 미미한 느낌들을 느낄 수 있고, 그 느낌들이 어디로부터 오는가를 알 수 있습니다. 느낌을 느낄 수 있으면 그 느낌을 형상화 할 수도 있습니다. 그렇게 되면 괴롭고 우울한 기쁨은 덜어내거나 피해 갈 수 있고, 이유 모를 기쁨과 이유 모를 행복감으로 다가오던 그 느낌들은 더 또렷하고 분명해지니 키울 수 있습니다.
영종도는 징검다리 같이 놓인 섬들을 연육교로 연결해 뭍과 이어졌습니다. 예전 같으면 나룻배나 기선이 들락거렸을 그 영종도가 이젠 하늘 길 드나드는 관문이 되어 있습니다. 옛날에는 제비가 많아 영종도를 "자연도(紫燕島)"로 불렀다고 합니다. 이런 영종도에 야트막하나 우뚝 솟은 산 하나 있으니 그 산이 바로 해발 256m의 백운산입니다. 이 백운산 동쪽 기슭으로 올라가면 영종도에서 가장 오래된 용궁사가 있습니다. 공항터미널서 백운산으로 가는 길은 해변길입니다. 축조된 방파제 너머로 바다와 갯벌이 뒤범벅입니다. 갯벌 저 안쪽으로 보이는 작은 배들은 닻을 내리고 낚시를 드리웠는지 미동도 하지 않습니다. 출렁이는 파도, 뿌뿌~ 거리는 뱃고동 소리를 마음에 담았건만 찾아간 초입의 영종도는 그런 영종도가 아니었습니다. 뱃길을 대신해 시멘트 포장길이 깔렸고 뿌뿌~ 거리는 뱃고동소리를 대신해 비행기 소리만 들릴 뿐입니다. 조금 더 들어가다 보니 방파제 안쪽으로 염전이 보입니다. 바닷물 가두고, 그 바닷물 증발시켜 소금 얻어 내는 천일염 염전이 아직 남아있습니다. 지금이야 볼거리쯤으로 여겨질지 모르지만 예전에는 한 가정의 생계수단이며 영종도의 수입원이었을 삶의 터전입니다. 햇볕 쨍쨍한 한여름엔 머리에 질끈 동여맨 두건에도 소금이 달렸을 것 같습니다. 고무래질하느라 뚝뚝 흘렸을 그들의 땀도 소금이 되었을 그런 염전입니다. 마을에 도착하니 15분 정도만 더 걸어가면 용궁사라고 합니다. 마을에서 용궁사까지 이어지는 진입로 산길은 낙엽수 빼곡한 울창한 숲길입니다. 여느 절들처럼 소나무나 전나무는 아니었지만 한여름이면 컴컴하도록 그늘이 질 것 같은 숲길입니다.
일주문을 대신해 입구 양쪽에는 진언 '옴마니반메훔'이 음각된 표지석이 세워져 있습니다. 정면으로 용황각이 보입니다. 표지석 지나 왼쪽으로 올라가면 석가모니부처님 모신 대웅보전입니다. 근래에 새로 지은 조립식건물인 듯 야트막하고 싱글 지붕을 이었습니다. 현실적으로 어쩔 수 없었겠지만 용궁사의 역사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느낌입니다. 용궁사에서 느낄 수 있는 그 세월감은 아무래도 입구 오른쪽에 있는 전각들과 느티나무에서 찾아야 할 듯합니다. 용궁사 경내에는 수령이 1300년쯤 되었을 거라는 오래된 느티나무가 2그루나 있습니다. 오래 된 마을이나 오래 된 절들을 찾아가면 그 곳의 역사며 세월의 징표인 듯 고목이 된 느티나무나 은행나무 한 그루쯤 어렵지 않게 찾을 수 있습니다.
경내로 들어선 마당 양쪽에 있는 용궁사 느티나무는 할아버지와 할머니 느티나무로 그 금실이 좋아 지금도 절손의 위기에 있는 사람들이 간절하게 기도하면 후손 하나쯤 점지해 주는 왕성한 신통을 보인다고 합니다. 한때는 그 수형도 뛰어났겠지만 지금은 전형적 고목의 모습입니다. 어쩔 수 없는 게 세월인지 여기저기 검버섯처럼 땜질이 되어있고 지팡이 같은 버팀목도 괴고 있습니다. 토굴이라도 되는 듯 느티나무 움푹한 곳에 아기동자상이 놓여있습니다. 받쳐 든 발우엔 동자승이 그리던 어머니가 들어 있고 조석으로 찬탄하던 염불이 들어있을 듯합니다.
여느 절들과 달리 용궁사 들어서며 맞게 되는 첫 전각은 대웅전도 관음전도 아닌 요사입니다. 마루가 있고, 그 중앙에 대원군 친필이라는 '龍宮寺' 편액이 달리긴 했지만 스님들이 수행, 참선하며 기거하는 요사임에 틀림없습니다. 예전에야 어떻게 쓰였나 모르지만 대개의 절들이 전면에 법당이 있고 한쪽으로 요사가 있었던 것과는 독특한 차이입니다. 이 요사 뒤쪽으로 돌아가면 좌측으로 관음전이 있고 우측으로 칠성각이 있습니다. 정면 3칸에 맞배지붕인 관음전 4개의 기둥엔 해강 김규진이 썼다는 주련이 걸려 있습니다. 서산 개심사의 그 커다란 편액, '象王山開心寺'라는 편액을 쓴 해강 김규진이 이곳 용궁사에서는 주련을 쓴 모양입니다. 눈에 익은 필체가 반갑기도 하고 예서체의 그 아름다움과 뛰어남에 눈길이 쏠립니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물을 건질 때마다 그 옥돌부처가 걸려 올라왔습니다. 이런 일이 반복되니 손씨로서도 예삿일이 아닌 듯 생각되었습니다. 무슨 사연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손씨가 그 옥돌부처를 백운사로 가져가니 그때부터 백운사에 모시게 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말이나 소를 타고 그냥 백운사 앞을 지나려면 어찌된 일인지 우마의 발이 땅에서 떨어지질 않아 움직일 수 없었다고 합니다. 이러한 사실이 소문으로 널리 퍼지니 그 이후론 절 앞을 지나려면 누구든 우마에서 내려 걸었다고 합니다.
관음전과 칠성각 뒤쪽 언덕으로 근래 만들어진 듯 한 미륵 불상이 보입니다. 이 미륵불상엘 가기 위해서는 입구에 있는 느티나무와 요사 뒤로 이어진 침목계단으로 올라가야 합니다. 빡빡 머리가 조금 자란 듯 침목을 가지런히 박아 계단을 만들었습니다. 계단이 끝나는 우측엔 자그마한 석불도 놓여있습니다. 미륵불상은 용궁사를 관조하고 세상을 관조하듯 지긋한 눈빛으로 입구 향해 자비로운 미소를 보냅니다. 스님이 장작을 패고 계십니다. 내려갈 거라 인사 드리니 손길 잠시 멈추고 이마의 땀 훔쳐내며 어서 가라 손짓하십니다. 느티나무의 기다란 그늘이 용궁사에 드리웁니다. 드리운 그늘 사이로 감각이 솟아나고 느낌이 올라옵니다.
누구라도 가랑비처럼 흘려주는 이 미소 보면 감칠맛 나는 미소라 하며 함께 살맛난다 할 텐데…. |
용인시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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