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인시지체장애인협회 역삼동분회장 안종남씨

눈이 오나, 비가 오나 전동휠체어에 태극기 달고 용인시내 거리를 씽~씽 다니는 이 사람.

끈질긴 생명력으로 버텨온 그는 여러 어려운 고통을 수없이 이겨내고 희망의 미소를 보인다.

자신의 얼굴 표정에 따라 울고 웃는 가족들을 보며 10년 만에 목발에 의지해 걸음마를 시작했고, 열아홉살에 초등학교를 졸업했다.

10번이나 눈 수술을 받아 세상을 다시 보게 됐지만 일주일 세 번씩 혈액투석을 받아야 살 수 있는 처지다.

몇 개월 전 아내를 먼저 떠나보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하기만 하다.

그러나 그는 오늘도 신나게 밖으로 나간다.

그리고 환하게 웃는다. 그의 모습은 정말 아름답다!

“몸이 불편해도 남보다 한발 먼저”

지체장애 2급, 신장장애 2급 그래서 중복장애 1급인 안종남씨(53·역북동). 앞에 붙은 말로만으로 신체의 불편함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안씨는 장애를 탓하며 살지 않는다. 누구보다 힘든 상황이지만 그와 얼굴을 맞대고 몇 마디만 주고 받으면 즐겁게 사는 삶이 쉽게 느껴진다.

태극기를 휘날리며 전동휠체어에 몸을 싣고 용인 거리를 누비는 안씨는 세상을 보는 눈이 다르다.

“저는 생각 자체가 달라요. 장애인이라고 받으려고만 하지 않고 베풀려고 노력해요. 비록 몸은 부자연스러워도 비장애인과 거리를 좁히면 함께 살아가게 되는 것 같아요.”

혈액투석 환자 옆에서 쉴새 없이 이야기

용인시지체장애인협회 역삼동분회장을 맡고 있는 안씨는 삶을 살아가는 생각이 다르다는 그의 말처럼 장애인, 비장애인 모두에게 ‘대단한 사람’이라는 말을 듣는다.

두 살 때 소아마비로 장애인의 삶의 살아갈 수밖에 없었던 안씨. 그렇지만 10년 만에 처음 목발에 의지해 걸을 수 있게 됐고 19살 되던 해 간신히 한터초등학교를 졸업했다.

‘왜 장애인으로 살아야 하나’하는 비관적인 생각도 많이 했다. “목발 짚고 길에서 사람들을 만나면 나를 피했고 사람 셋만 모이면 가질 않았으니까요.” 하지만 그는 그렇게 주저앉지 않았다. 사춘기 때 생각을 새롭게 바꿨다. 밥상에 둘러앉은 가족들이 자신의 얼굴 표정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본 후부터였다. “나를 보고 불쌍하다 혀를 차면 ‘음, 나한테 잘생겼다’ 말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니까 웃을 수 있었어요.”

그래서 그는 장애인의 서러움을 느끼지 않고 산다. 양지면 대대리가 고향인 그는 버스도 안다니는 집에서 8km를 걸어 나와 서울 창신동 장애인 모임에 매달 참석하는 열성을 보였다.

▲ 용인시지체장애인협회 역삼동분회장 안종남씨
학교를 졸업한 후 시계수리 기술을 배워 30년 동안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했고 나이 마흔에 ‘늦깎이 새신랑’이 됐다.

요즈음은 시도 쓰고, 컴퓨터 공부도 하며 끊임없이 도전하고 용인에서 열리는 건강걷기 대회 등 각종 행사장을 찾아 용인시민의 한사람으로서 참여한다.

“눈이 오든 비가 오든 활동적으로 살고 누가 모여 있으면 더 가죠. 사람들을 많이 만나요. 비 오는데 왜 나오느냐고 물으면 우산 쓰고 밖에 나오는 건 장애인이나 비장애인이나 똑같잖아요. ”

즐겁게 사는 그의 모습에 장애인이라고 인식하지 않는 가족들을 보면서 사회생활에도 자신감을 얻은 것이다. 그렇다고 매일매일이 기쁜 하루는 아니었다. 불편한 몸을 잊고 살았는데 당뇨로 인한 합병증으로 시력이 떨어져 10번이나 눈 수술을 받고 다시 세상을 보게 됐다. 눈이 괜찮아지니 신장이 말썽이었다. 2003년 4월부터 일주일에 세 번 하루 4시간씩 혈액 투석을 받는 안씨는 그 고통마저 웃음으로 극복하고 다른 신장장애인들에게 오히려 웃음을 준다.

“인공신장실에서의 싸움은 자기와의 싸움이기 때문에 마음가짐에 따라 달라져요. 혈액투석은 환자보다 주변사람 고생이 더해요. 그 사람들 고통 덜 하려면 자신이 활발해야하지 않을까요.” 그는 환자들에게 용기를 주려고 애쓴다. 주변에서 “저 아저씨는 뭐가 좋다고 웃고 떠들까”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은 안씨가 들려주는 세상 얘기가 재미있기만 하다.

안씨 역시 스스로 즐거움을 찾기 위해 새벽 5시에 일어나 병원에 6시에 가서 1시간을 기다렸다 혈액투석을 받는다. “의무적으로 받는게 아니라 치료도 즐겁게 받고 싶어서 한 시간을 기다려도 꼭 일등으로 병원에 가요.”

늘 배불리 먹지 못하고 냉수조차 제대로 못 먹는 고통스런 삶 속에서도 그는 언제나 남들보다 한발 앞서 나가기를 바란다.

하늘에서 지켜보는 ‘내 사랑 나의 천사’

하지만 요즈음 그는 힘들다. 늘 옆에 있던 부인이 지난해 8월초 폐암 판정을 받고 70일 만에 먼저 떠나서다.

“혼자서 불편한 몸으로 산다고 생각해 봐요. 투석실에는 보호자들이 다 따라 다니는데… 마누라 없는 티 안내려고 더 노력하죠.” 어느새 눈시울이 붉어졌다.

시 쓰기를 좋아하는 안씨는 아내에게 결혼기념일, 생일 때마다 편지 겉봉투에 ‘당신의 사랑을 먹고 사는 꼬마신랑’이라고 적어 보냈다며 아내와 함께 했던 기억을 떠올렸다.

“집사람은 천사였어요. 나와 살아준 죄 밖에 없는데 갑자기 세상을 떠났죠. 어디 놀러가도 언덕에 오르면 업어주기도 하고, 둘이 평생 행복할 줄 알았는데….”

누구보다 많이 알고 많이 보고 느끼려고 노력하는 안씨도 아내가 떠나고 일이 손에 안 잡혀 게으른 생활을 한다고 했다. 그래도 남들에게 살아있는 동안 희망과 용기를 주겠다는 생각은 변함없다. 가족들이 시골집에서 함께 살자고 해도 그는 꿋꿋하게 최선을 다한다.

“우리 같은 사람은 끈질긴 생명력이 있으니까요.”

장애인복지관 가는 길에 인도 있었으면

그는 혈액투석을 하기 전 승용차에 장애인들을 태워 이발봉사를 했었다. 조금 더 부지런해서 할 수 있었다.

“몸이 많이 아파서 이발 봉사를 못하게 돼 자원활동가에게 봉사를 부탁했는데 마음이 많이 아팠어요. 혹여 장애인들이 밖에 나올 수 있는 기회조차 뺏고 상실감을 준 것은 아닌지.” 지역 장애인들에게 귀감이 되려고 노력한다는 그는 밀알봉사단에서도 7여 년 간 봉사활동을 펼쳤다.

즐겁게 사는 비결은 욕심이 없어서라고 자신 있게 말하는 안씨.

그는 고림동 장애인종합복지관 가는 길이 편해지길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인도가 없어서 장애인들이 버스에서 내려 걸어오기 힘들기 때문이다.

주어진 삶을 열심히 살기 위해 일찍 일어난다는 안씨의 소박한 생각은 어느새 주위를 환하게 비추는 빛이 되고 있다.

안씨는 장애인과 비장애인이 서로 어울려 마음껏 웃을 수 있는 세상을 그리며 오늘도 세상 밖으로 행복한 외출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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