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집 운영하는 원풍모방노조 해고노동자 박순애씨
그 가운데 박순애씨(51·구성읍 보정리)도 눈에 띤다.
바람만 불어도 쓰러질 듯한 가냘픈 몸이지만 ‘옳은 일’앞에서는 전혀 흔들림이 없다.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다. 미싱을 돌리며 밤을 지새 던 10대는 시간 저편으로 사라져 어느 덧 50줄에 들어섰지만 20여 년 전 그 마음은 늘 한결같다.
‘그 마음이면 무슨 일을 못하겠느냐.’
그때 그 시절은 지금 그가 살아가는 기운이다.
# 82년 10월, 그땐 그랬지…
‘70년대 민주노조 운동의 마지막 깃발이 내리는구나!’
원풍모방 노동자들은 72년 8월, 노동조합 정상화를 요구하는 총파업으로 민주노조를 건설해 10년간 운영해왔다. 그러나 80년 이른바 ‘노동계 정화조캄로 핵심 조합원 48명이 계엄사령부로 연행되고 다른 4명은 삼청교육대로 보내지는 등 고초를 겪다 결국 82년 정부정책에 의해 노동조합이 파괴된다.
조합이 강제 해산되는 그날까지 목 놓아 부당해고, 노조정상화를 외쳤던 부위원장 박씨.
그는 정읍에서 중학교를 마치고 72년 서울로 올라와 공장(한국모방)에 취직한 후, 노조활동을 시작했다. “18살부터 여공으로 일한 거예요. 앳된 나이에 돈벌면서 쫓겨날 때까지 10년 넘게 다닌 거죠.”
“그 당시 노동현장이야 워낙 열악해서 평일 12시간 씩 주야로 교대 근무하고 일요일도 쉬는 날이 없었죠. 폐병 걸려 죽는 애들도 많았을 정도니까.”
그 당시 원풍모방은 도시산업선교회와 연관을 맺고 여러 소그룹을 만들어 활동했다. 박씨 역시 꽃꽂이, 탈춤반 등 소그룹 활동을 하면서 근로기준법 등 노동에 관한 교육을 받으며 근로자들과 함께 힘을 보태 민주노조에 참여했다.
“배운 건 없지만 노조교육이 생명이라는 생각으로 교육 받고 교육도 시켰어요. 어용노조를 개혁하고 민주노조를 결성하자는 목적이었지요.”
이러한 가운데 회사측의 부당해고라는 보복조치가 이뤄져 노조원들의 파업농성이 이어졌다.
“돈 있고 권력 있다고 해서 노동자를 마음대로 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줘야 했어요.”
이렇게 10년 동안 민주노조 건설을 위해 힘을 모아온 노조원들은 1000여 명에 달했다.
하지만 시련은 계속됐다. 80년 노동계 정화조치 이후 회사는 온갖 억지와 트집을 잡아 노조를 흔들었고 언론은 도시산업선교회와 손잡고 회사의 도산을 꾀하는 세력으로 원풍모방을 들먹였다.
하지만 꺾이지 않았다. 비상계엄 확대와 광주학살 소식으로 모두 숨 죽이고 있는 80년 5월말, 원풍노조원들은 모금운동을 벌여 500여 만원을 광주의 가톨릭 대주교 윤공희씨에게 전달했다. “누가 알면 빨갱이로 다 잡혀갔지. 그 정도로 노조가 조직적으로 잘 움직였어요.”
그리고 82년, 탄압은 점점 거세졌다. 이 때 박씨도 해고됐다. 노조 교육선전차장을 맡아 대의원으로 활동했던 박씨는 9월27일 노조 사무실에서 대의원 모임을 갖고 향후 대책을 논의했다. 그 순간…
“시커멓고 무시무시한 놈들이 문을 박차고 들어와 부스고 노조원들을 가뒀어요. 위원장은 감금당한 채 밤새 사표를 강요당했고 600명이 넘는 조합원들은 철야농성을 시작했죠.”
박씨는 그 때 사무실에 모아둔 노조 자금을 현장에 일하는 근로자에게 넘겨주고 유리창을 깨고 도망쳐 다시 노조 농성에 합류했다.
그날은 원풍노조가 정부의 치밀한 계획에 의해 해산된 날이다.
“언론에서는 농성장 안 남녀가 혼숙을 한다며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다고 보도하고 물, 전기도 끊고 고향에 있는 가족, 선생, 경찰들을 동원해 농성 해산을 시도했어요.”
그 후, 박씨는 노조 부위원장을 맡아 노조원들과 함께 막바지까지 투쟁을 벌이다 추석 즈음인 10월5일 결국 고척동 구치소로 연행되고 만다. 그 당시 죄명은 ‘제3자개입금지죄’였다.
“참 말도 안되죠. 해고된 사람이 그 다음날인 27일 농성에 참가해서 제3자가 된 거죠. 기가 막히죠.”
#그른 것과 타협하지 않겠다
그는 옥살이를 하고 다음해 8·15 특사로 나오게 된다. 감시망을 뚫고 바로 다음날 서울로 올라와 이곳저곳 이력서를 냈지만 이미 블랙리스트에 올라 취직을 할 수 없었다. 가까스로 취직이 되더라도 금 새 들통 나 쫓겨나기 일쑤였다.
“그래도 후회하지 않았어요. 투쟁의 목적과 대상이 분명했고 옳은 일이라고 생각했거든요. 그 때 작업현장 노동자는 짐승만도 못했으니까.”
그는 신세를 원망하지 않고 공부할 수 있는 기회가 있으면 어디든 다녔다. 재판장가서 판사 판결문도 들어보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 32살 전주에서 결혼해 아들 둘을 봤다. “선을 볼 때 마다 노동운동 했다고 밝히면 별로 안 좋아 하더라고요. 그래서 결혼이 좀 늦어졌죠.”
그는 가정을 꾸리고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가 과천에서 꽃 농장을 할 계획이었지만 사기로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결국 제부지간인 김순경 시의원 도움으로 구성읍 보정리에 터를 잡고 장미농사를 지으며 구성읍 삼거리에서 경기농장 화원을 운영한지 13년째다.
“서슬이 퍼렇던 시절도 어느새 지났는데 여전히 힘없는 서민들은 권력자들의 들러리 밖에 안된다는 생각을 해요.”
박씨는 평범한 일상을 보내면서 명예회복과 복직을 위한 소리 없는 싸움을 계속해 왔다. 2002년 6월, 민주화운동관련자명예회복 및 보상심의위원회로부터 ‘1982년 9월15일 원풍산업노동조합 합법성 쟁취 시위에 참가한 활동과 관련 83년 3월4일 노동쟁의조정법위반으로 징역 1년 선고 82년 9월25일 원풍산업에서 해고된 사실 명예회복’에 관한 통지를 받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로부터 민주화운동 관련자 인정 통지를 받았지만 아직도 풀어야할 과제는 남아 있다.
“민주노조가 깨진 9월27일을 기념해 해마다 그 때 노조원들을 만나고 있어요. 그 사람들과 함께라면 어떤 일이라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아요. 지금은 가슴에 맺힌 억울함을 풀어줬으면 하는 마지막 바람이 있죠.”
여공 인생을 마음에 담고 꽃집 아줌마로 살아가는 박씨는 (사)녹생환경운동 운영위원, 용인참여자치시민연대 회원으로 활동 중이다. 그리고 거리로 나서 명예회복을 외칠 만큼 열정이 살아 있다.
그른 것과 타협하지 않겠다며 걸어온 박씨는 장미가 내뿜는 향기에 묻혀 찬란하게 꽃피는 봄날을 기다린다.
전자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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