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육 문화예술 다방면에서 활동하는 차진복씨

▲ 용인초 씨름부 아이들과 차진복 감독.
용인에서 열리는 웬만한 체육문화공연 행사장에서 쉽게 띄는 낯익은 얼굴. 매번 복장과 역할도 다르다. 트레이닝복을 차려입은 씨름부 감독, 깔끔한 검은 정장 차림의 합창단원, 고운 민복 차림의 풍물단원, 물감들은 자유로운 복장!

대체 하는 일은?

“제 인생의 주인공은 씨름부 감독이죠.”

차진복(48)씨 인생은 참 다양하다. 체육은 본업이며 문화예술 행위는 삶의 전부다. 그의 삶이 소중하기 때문이다. 가끔 힘에 겨울 때도 있지만 행복해서 금새 잊어버리는 차씨.

지역에서 꿈을 이뤄나가며 살겠다는 그의 인생살이, 글로 엮어 본다.

# 오늘, 나

차진복씨는 백암 용천리가 고향이다. ‘쇠(꽹과리)’를 잘 치기로 정평이 난 용인농악단 단장 차용성씨 셋째 아들. 차씨는 그림에 소질이 있었다. 아니 그림그리기를 어려서부터 좋아했다고 한다. 또 농사철이면 어김없이 법구재비로 나서 농사꾼들 피로를 풀어줬던 아버지 모습이 무척 자랑스러웠다.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하는 것은 다 이어받고 싶었어요. 저는 그런 모습이 정말 좋았거든요.”하지만 그는 대학에서 서양화를 전공했다. 더욱이 그림을 마음 놓고 그린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밑으로 동생들이 여럿 있었고 농사꾼 아들에게 대학 졸업은 만만치 않았다.

그는 결국 생업에 뛰어들었다. 이 때부터 씨름 지도자의 길을 걷게 됐다.

“백암중학교를 다니면서 씨름을 배웠던 적이 있어서 씨름협회 도움 받아 92년도에 지도자를 하게 된 거죠.”

그렇게 지도자로 걸어온 지 어느덧 20년이 훌쩍 지났다. 그는 용인에 씨름의 뿌리를 내렸다는 평가를 받을 만큼 씨름 불모지인 용인에 꿈나무를 육성하면서 기초 씨름을 튼튼히 했다.

용인초등학교 씨름 감독을 92년부터 시작해 전국대회 5회 우승은 물론 각종대회 때 마다 상을 휩쓸었다. 2002년도에는 대한씨름협회에서 수여하는 ‘2002년 올해의 지도자 대상’을 수상했다. 용인씨름 열풍에 큰 기여를 한 결과다. 그는 씨름 발전을 위한 씨름협회 지도자모임을 이끄는 회장을 맡아 현재 활동 중이다.

“씨름 지도자가 인생의 본업이 됐죠. 시간이 지나면서 인정도 받으니까 보람 있고 무엇보다 제자들 중에서 레슬링 주니어 대표도 나오고 씨름을 배우겠다고 찾아오는 어린이를 보면 뿌듯하죠. 거기다 용인초 씨름부가 발전하면 더욱 좋고요.”

대구·경북 지역이 씨름 강세 권역이었는데 용인씨름이 전국 상위권에 오르면서 용인의 씨름은 전국적으로 돌풍을 몰고 왔다.

“씨름협회가 탄탄하고 초·중·고 대학 일반부, 실업팀까지 연계돼 있는 것이 용인 씨름이 성장할 수 있었던 기반이 됐죠.” 그러나 아직도 그는 씨름에 대한 시선이 따갑고 점점 인기가 떨어지는 현실에 안타까워했다. 그래도 힘이 솟는다.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아이들이 모래판에서 씨름을 열심히 하고 또, 그는 태평소도 불고, 노래도 하며 그림을 그리기 때문이다.

# 내 안의 새로운 나

문화예술행사에서 차씨를 자주 볼 수 있는 것은 그가 용인혼성합창단, 용인풍물단, 용인그림사랑회 회원으로 활동해서다.

▲ 차진복씨가 그린 ‘풍경’
서양화를 전공했던 차씨는 그림을 그리고 싶은 마음에 아마추어 미술활동에 참여하면서 해마다 열리는 전시회에 꼭 참여한다.

“형편이 나아지면 다시 복학해야겠다고 생각했는데 그렇게 못해서 그림사랑회 회원이 됐죠. 전공의 꿈을 사회에서 키우고 있는 거죠.”

그리고 노래를 좋아하고 교회 성가대에 나가면서 음악공부를 하고 싶었던 차씨는 자연스럽게 용인혼성합창단 단원이 됐다.

“합창단 수준이 상당해요. 국립극장 공연도 하고…큰 무대에 많이 섰어요.” 합창은 차씨의 애환을 달래준다고 한다.

그리고 그는 10년 전부터 태평소를 불기 시작했다. 한 교사가 국립국악원에서 태평소 배우는 것을 보고 시작했다.

“시골서 아버지를 보고 자라면서 태평소가 귀에 익었어요. 소리가 참 좋더라고요.”

혼자 연주하지만 태평소를 불 때 마다 혼신의 힘을 다하며 가락을 탄다는 차씨는 마냥 신나기만 하다.

“농악과 씨름이 잘 어울리죠”.

▲ 태평소를 부는 차진복씨
그리고 시름을 태평소에 실려 보내면 마음이 후련해진다. 차씨는 이러한 활동이 아이들 지도에 많은 도움이 된다고 말한다. 강한 자신감을 심어준다고 믿는다.

이렇게 바쁜 삶을 살다보니 아내와 두 딸에게 소홀해 늘 미안하다. “집에 제 시간에 들어갈 때도 없고 잘 챙겨주지 못했는데 공부도 잘하고 잘 커줘서 고맙죠.”

차씨가 씨름, 음악, 풍물, 그림을 사랑할 수 있었던 것 역시 가족이 있기 때문이다.

# 아버지와 똑 닮은 ‘아들’

“용인에서 평생 후배를 양성하며 살고 싶다”는 차씨는 후배 지도자들과 그 꿈을 함께 키우겠다는 마음을 밝히며 후배들이 씨름을 이끌어 나갈 수 있도록 도울 계획이다.

그리고 앞으로는 아버지와 똑 닮은 차진복이 되려고 마음먹었다. 작년 연말 아버지가 뇌수술을 받아 건강이 나빠지자 아버지 재능을 이어받지 못한 아쉬움이 컸다.

“요즈음 아버지가 잘 하시는 ‘비나리’ 가락을 적어 연습하고 있는데 쉽지 않네요. 쇠도 배워야 하고…아버지가 무대에 서는 것을 힘들어하셔서 이전처럼 연주하실 수 있을지 걱정도 되고요.”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자랑스러웠던 차씨. 아버지와 한 무대에 서는 그날을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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