텃밭에서 캔 행복한 이야기(5)

▲ 둘째 진희가 찍어준 사진입니다.
ⓒ2005 김진희

햇살과 바람이 어우러져 상쾌한 날이다. 텃밭 한구석에 두 어 줌 뿌려둔 완두가 있었는데 워낙 적다보니 푸릇푸릇할 때 따서 풋풋한 완두의 맛을 느낄 정도까지 되지는 못했다. 그래도 그냥 두었더니 제법 씨앗으로 두기엔 충분할 만큼 익었다. 농사짓는 진정한 맛은 아무래도 씨앗을 두는 것보다 막 거둔 것을 먹는 것에서 느낀다.

완두를 거둬 와 뜰에 앉아 완두를 딴다.
조금 더 신경을 썼더라면 좀더 실한 완두를 거뒀을 터인데 그냥 심어놓고 농약과 화학비료를 주지 않았다. 농약과 비료를 주지 않아 유기농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엄밀하게 이야기하면 유기농은 아니다. 유기농이라고 하려면 필요한 영양분들을 친환경적인 방법으로 제공해 주었어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냥 뿌려놓기만 한 것은 아니고 씨앗을 뿌리기 전에 텃밭의 잡초를 뽑아 비닐을 덮어 한 곳에 쌓아두었다가 퇴비로 만들어 설설 뿌리고 심어주었다.

그래도 신기한 것은 퇴비가 뿌려진 곳과 그렇지 않은 곳은 아무래도 다르다는 것이다. 쓸모 없다고 여겨지는 잡초가 쓸모없는 것이 아니라 농사를 짓는데 이렇게 저렇게 필요하다. 일손이 부족한 농촌에서는 주로 제초제의 힘을 빌리는데 잡초가 자라지 못하는 땅에서 자라는 것이 우리의 식탁에 올라온들 배는 채워줄 수 있을지언정 우리의 건강을 위협할 것은 자명하다.

잡초가 잘 자라는 곳은 채소도 잘되고, 잡초가 잘 자라지 못하는 곳은 아무래도 부실한 채소가 자라는 것을 보면 좋은 땅은 잡초들도 아는가 보다. 잡초가 무성해지면 씨앗을 맺기 전에 뽑아 비닐로 덮어 퇴비를 만드는데 신기한 것은 언제 씨앗이 떨어졌는지 매일 잡초를 뽑아도 그 생명을 끝없이 이어간다는 것이다.

무언가를 심고 거둔다는 것, 그것은 참 행복한 일이다.

ⓒ2005 김민수
내가 심고 거둔 완두는 콩깍지 하나에 평균 네 개의 완두가 들어 있다. 물론 더 적은 것도 있고 많은 것도 있지만 아무래도 자잘하다. 그러나 자잘하면 어떠리, 내가 심고 거둔 것인데 그 맛이 어디 갈까?

똑같은 음식도 직접 만들면 맛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면 더 맛난 법이다. 오일장에 나가 천 원이면 시골 할망들이 정성껏 키워 작은 종지에 담아 파는 완두를 살 수 있다. 객관적으로야 어찌 내가 심고 거둔 완두가 그 할망들의 완두를 따라갈 수 있을 것인가? 그런데 인생이란, 삶이란 지극히 주관적인 것이 아니겠는가?

어떤 사람은 행복해 보이는 조건들이 너무 많은 것 같아도 불행하게 살아가고, 어떤 이들은 절망할 것 같은데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아간다. 그것은 삶이라는 것, 그리고 우리 인생에서 만나는 것들이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이라는 증거이기도 하다.

ⓒ2005 김민수
어릴 적 서울 근교에서 부모님은 농사를 지셨다.
물론 완두도 심으셨는데 콩깍지가 푸릇푸릇할 때 따서 하나하나 까서 재래시장이나 오일장에 나가 각종 채소와 함께 파셨다. 내 기억으로는 완두 한 종지에 그 당시 버스요금의 왕복요금정도인 50원이었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니 어쩌면 요즘보다는 시세가 좋았는지도 모르겠다. 오일장에 나가보면 완두 한 종지에 천 원인데 그것으로 버스왕복요금이 될 수 없으니 말이다.

어머니는 해지기 전에 완두를 따오셔서는 백열전구 아래서 졸린 눈을 비벼가며 콩깍지를 까셨고, TV나 마땅한 놀이기구가 없었던 시절 콩깍지를 까는 것은 나에게 재미난 놀이였다. 푸릇푸릇한 초록완두가 얼마나 예쁜지 팔기가 아까울 정도였다. 완두가 나올 무렵이면 보리도 익어갈 무렵이라 제법 밥상도 푸성귀들과 함께 풍성해졌다. 먹을 것이 풍성해 지면 사람의 마음도 넉넉해지는 법인지라 초록완두가 들어간 하얀 쌀밥을 실컷 먹을 수도 있었다.

국가적으로 혼식장려를 하던 때가 있었다.
학교에서는 도시락검사를 해서 보리와 쌀의 비율까지 엄격하게 조사를 하기도 했고, 보리가 많이 들어간 도시락이 모범도시락이었던 시절이 있었고, 보리에 콩이나 조 같은 것까지 섞여 있으면 그야말로 일품도시락이라고 칭찬을 받기도 했었다. 물론 도시락을 싸오지 못하는 아이들도 많을 때의 이야기다.

ⓒ2005 김민수
그렇게 완두를 다 까보니 시장에서 사는 가격으로 치면 이천 원어치 정도밖에는 안 된다. 게다가 이렇게 작은 완두는 상품성도 없으니 시장에서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반대로 생각하니 시장에서 살 수 없는 것, 그것을 내가 먹게 되는구나하고 감사하게 된다.

아이들도 얼마 안 되는 완두를 깐다고 달려들었다.

'그려, 너희들만한 아이들 중에서 완두를 까본 경험이 있는 아이들이 얼마나 되겠니?'

콩깍지와 줄기는 따로 모아서 퇴비로 만들 준비를 하고, 완두는 아내에게 건네준다. 아마 오늘 저녁이나 내일 아침에는 완두가 들어간 밥이 나올 것이다. 입안에서 톡톡 터지는 그 느낌, 그 푸릇한 느낌이 기대된다.

행복이란,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들이 불행한 이유는 자기 안에 있는 행복을 보지 못하고 먼 곳에 있는 신기루 같은 행복에만 매달리기 때문이다. 먼 곳에 있는 행복은 신기루 같아서 잡을 수도 없고, 느낄 수도 없어서 공허하다. 내 안에 있는 행복의 조건들, 가만히 살펴보면 지금 살아 숨쉬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감사할 수 있을 때가 얼마나 많은가. 비록 고통의 정점에 서 있다고 하더라도 감사하고, 행복해 할 수 있는 조건들이 얼마나 많은가.

간혹 가까운 지인들이 그까짓 게 뭐 그리 대수라고 좋아하냐고 한다. 그걸 어떻게 말로 설명을 할 수가 없다. 그저 "몰러, 난 좋아"할 뿐이다.

다음 날 아침, 드디어 완두가 소담스럽게 섞여있는 밥이 나왔다. 아이들도 자기가 직접 깐 콩이라며 맛나게 먹어주니 고맙기만 하다.

"허, 고 작은 것들이 맛만 좋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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