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에 피는 풀꽃 이야기

▲ 꽃마리
ⓒ2005 국은정
꽃빛이 화려하고 꽃잎이 큰 목련, 개나리, 벚꽃, 진달래와 같은 나무에서 피는 꽃들과는 다르게 지천으로 널려 있지만 쉽게 사람들의 눈길을 끌지 못하는 꽃들이 있다. 꽃이 피기 전에는 그걸 굳이 '꽃'이라 부르지 않고, 그냥 '풀'이라고 부른다. 큰 것은 큰 것 대로 나름의 멋과 아름다움이 있듯이, 작은 것은 작은 것 대로 나름의 멋과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오늘은 작고 여린 풀꽃들을 찾아 나섰다.

▲ 민들레
ⓒ2005 국은정
아스팔트 갈라진 틈이라도, 시멘트 깨진 구석 자리라도 좋다. 그저 홀씨 하나 날아와 앉을 공간만 허락된다면 그 어디라도 좋다. 가혹하리만치 비좁은 틈을 뚫고 뿌리를 내린 민들레꽃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노라면 생명의 경이로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무심한 발길에 꽃잎이 문드러져도 민들레는 쉽게 그 생명을 포기하지 않는다. 그래서 가장 흔하고, 가장 보기 쉬운 꽃, 민들레! 우리 민초들의 삶이 그를 닮았다는 걸 과연 누가 부정할 수 있을까? 자리를 가리지 않고 피어나기 때문에 더 가엽고 애틋하고 사랑스러운 꽃이다.

눈여겨 보았다면 굳이 봄이 아니더라도 여름, 가을이 지나도록 노란 민들레꽃을 보았을 것이다. 간혹 겨울 혹한 속에서도 양지 바른 곳에서 민들레는 꽃을 피운다. 4월이 다 지나가도록 아직까지 민들레꽃을 보지 못한 사람은 불행한 사람일지도 모른다.

▲ 민들레 홀씨
ⓒ2005 국은정
서둘러 꽃을 피운 민들레는 하얗게 센 머리를 왕관처럼 쓰고 있다. 어릴 적 홀씨를 꺾어 바람에 날려보내던 기억이 민들레 홀씨 머리에 햇살로 부서진다. 저렇게 가벼워진 몸으로 세상을 둥둥 떠다니면 좋겠다고 꿈꾸던 동화 같은 시절이 내게도 있었다. 민들레 홀씨를 홀대하지 말라! 바람만 잘 타면 민들레 홀씨는 바다 건너까지도 날아갈 수 있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게 가벼워지는 것이 사람에겐 참 어려운 일인가 보다.

▲ 제비꽃
ⓒ2005 국은정
들꽃을 찍는 사진 작가들 사이에서는 '제비꽃을 보면 멀미를 한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만큼 제비꽃의 종류가 많고, 종류를 가려내기가 여간 어렵지 않다는 것이다. 혹자는 모두가 깊이 잠든 밤이면 제비꽃이 몰래 바람을 피우는 게 아니냐는 농담을 건네기도 한다. 그렇게 구별하기 힘들다는 제비꽃이 왜 나의 눈에는 그저 평범한 '제비꽃'으로만 보이는 걸까?

지난해 여름 나는 제비꽃 씨앗을 받아 두었다. 봄이 오면 화분에 직접 그 씨앗을 심어 보리라 다짐했지만 쌀쌀한 바깥 날씨만 걱정하고 있는 동안 땅 속에서는 이미 엄청난 역사가 벌어지고 있었던 모양이다. 제비꽃은 벌써 지천으로 피어 있다. 나는 그저 자연의 부지런함에 감탄만 할뿐이다!

사람도 닮은 얼굴이 있듯, 풀꽃들에게도 닮은 얼굴이 있다. 이름표를 달아주지 않으면 그 꽃이 그 꽃인 것만 같아 여러 번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그런 꽃들. 둘째라면 서러운 닮은꼴 꽃 중에서는 '쑥부쟁이'와 '구절초'가 단연 1순위다. '현호색'과 '괴불주머니'의 닮은꼴도 만만치 않다.

▲ 좀씀바귀
ⓒ2005 국은정
이 봄에 닮은 꽃을 찾으라면 '씀바귀'와 '고들빼기'가 그것이리라. 꽃만 봐서는 도저히 씀씨네 가족인지, 고씨네 가족인지 구별하기가 힘들다. 그래서 알게 된 것이 잎으로 알아보는 구별법이다. 씀바귀의 잎은 길죽길죽하게 창모양으로 뻗어 있는 반면에, 고들빼기의 잎은 꽃을 받치는 둥근 원형잎이 줄기에 접시처럼 매달려 있다. 턱시도 같은 덧잎을 달고 있는 게 바로 고들빼기다. 이 둘의 촌수를 따지면 아마도 사촌지간은 되지 않을까?

▲ 애기똥풀
ⓒ2005 국은정
꽃의 이름과 생김새가 아주 잘 어울리는 풀꽃, 애기똥풀! 이름만 들어도 웃음이 나는 귀엽고 앙증맞은 꽃이다. 몽글몽글 모아진 노란 꽃봉오리와 샛노랗게 핀 꽃송이를 가만히 들여다 보면 저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더구나 그 꽃의 줄기를 꺾으면 애기똥처럼 노란 진물이 흘러나온다. 그 진물이 마르면 어두운 황색으로 변하는 걸 볼 수 있다. 이처럼 우리꽃의 이름엔 다 나름대로 이유가 있다. 애기똥풀이 무리지어 피어있는 모습을 보게 된다면 해맑게 웃는 아기의 웃음을 한 바구니 선물로 받은 기분이리라.

▲ 보리뺑이
ⓒ2005 국은정
토끼풀꽃으로는 시계와 목걸이를, 제비꽃으로는 반지를 만들며 시간 가는 줄도 모르고 논둑길을 쏘다니던 어린 시절이 자꾸만 그리워진다. 근래에 나는 토끼풀과 제비꽃이 아닌 풀꽃으로 목걸이를 만드는 법을 배웠다. 바로 '보리뺑이'라는 풀꽃이다.

먼저 길다랗게 자란 보리뺑이 줄기를 꺾는다. 그런 다음 줄기의 끝에서부터 일정한 크기로 마디를 끊어내듯이 줄기를 벗겨낸다. 이때 마디와 껍질이 끊어지지 않도록 조심조심 해야 한다. 꽃송이가 있는 줄기까지 그렇게 계속 마디와 껍질을 이어내면 어렵지 않게 멋쟁이 풀꽃 목걸이를 만들 수 있다.

▲ 개불알풀
ⓒ2005 국은정

▲ 개별꽃
ⓒ2005 국은정
풀섶에 고만고만한 꽃들이 모여 앉았다.
"내가 누군지 맞춰 보세요!"
하는 소리가 듣리는 것 같다.

"그렇게 꽁꽁 숨어 있어도 나는 누가 누군지 가려낼 수 있단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 층층이 하얗게 쌓아올린 너는 냉이꽃, 작은 별이 내려앉은 것 같은 너는 개별꽃, 연한 하늘빛을 닮은 너는 꽃마리, 파란 꽃잎에 가는 핏줄 무늬가 있는 너는 개불알풀! 꼭꼭~ 숨어도 내 눈에는 보인다, 보여!"

정말이다. 눈을 크게 뜨면 누구나 다 찾을 수 있는, 그게 바로 우리의 풀꽃들이다.

▲ 냉이꽃
ⓒ2005 국은정
네가 등을 보인 뒤에 냉이꽃이 피었다
네 발자국 소리 나던 자리마다 냉이꽃이 피었다
약속도 미리 하지 않고 냉이꽃이 피었다
무엇 하러 피었나 물어보기 전에 냉이꽃이 피었다
쓸데없이 많이 냉이꽃이 피었다
내 이 아픈 게 다 낫고 나서 냉이꽃이 피었다
보일 듯 보일 듯 냉이꽃이 피었다
너하고 둘이 나란히 앉았던 자리에 냉이꽃이 피었다
너의 집이 보이는 언덕빼기에 냉이꽃이 피었다
문득문득 울고 싶어서 냉이꽃이 피었다
눈물을 참으려다가 냉이꽃이 피었다
너도 없는데 냉이꽃이 피었다
- 안도현, '냉이꽃' 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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