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지의 마지막 농부 황명호씨 모판 작업하던 날

▲ 황명호씨가 모판에 담을 흙을 옮기고 있다.
아파트단지를 쑤욱 들어가 광교산 한 자락 성복동 골짜기 한쪽으로 들판이 펼쳐진다. 비닐하우스 앞에서 마을사람 몇이 모여 무언가 일에 열중한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기계음이 들리고 삼삼오오 모인 농사꾼들이 네모난 틀에 흙을 퍼담고 돌아가는 기계에 갖다 대면 소독된 빠알간 볍씨를 흩뿌려준다. 벼 파종기 앞에 앉은 한사람은 낱알을 고르게 뿌리고 다른 사람은 볍씨가 든 판을 들어 옮기며 정렬작업을 한다.

오늘은 성복동의 마지막 농부 황명호씨(51)네 모판작업 하는 날.

날씨는 청명하고 바람은 솔솔 불어 일하기 좋은 날씨다. 수지는 택지개발이 되면서 농사지을 땅이 줄어들고 아파트가 산 아래로 계속 밀고 들어온다.

이 마을 농부들은 성복동도 택지개발 계획이 발표되고 개발을 눈앞에 두고 있어 얼마 남지 않은 농토에 올해 농사를 지을 수 있을까 생각했었다. 다행히 올가을에는 착공을 안 한다는 건설사의 발표에 의해 마지막 쌀농사 준비 작업을 하는 것이다.

황씨네 모판작업에 마을사람들이 품앗이로 나왔다. 수지의 마지막 농부라고 할 수 있는 황씨는 몇 대째 대를 이어 이곳에서 농사를 지으며 살아왔다. 그의 부친 황희천씨(74)는 8년째 마을 이장을 하며 동네일을 보고 있다. 이들 황씨부자는 동네에 개발바람이 불어와 같이 땅을 갈아먹으며 농사짓던 마을사람들이 하나 둘씩 떠나갈 때도 요즘처럼 마음이 착잡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하던 농사일이 있었고 사는 날까지 하던 일을 하며 살 요량이었다. 아버지 황씨는 새로 이사오는 아파트주민들을 불러들여 여름이면 손수 삼계탕을 끓이고 겨울이면 따 놓은 감과 도토리묵으로 대접하며 주민들과도 화합하며 지내왔다.

이제는 농사일은 대부분 아들 황씨의 몫이 됐다. 이곳에서 마지막 모판작업을 하며 오늘 황씨의 마음은 착잡하기 그지없다. 같이 일하는 마을사람들도 같은 마음인지 다들 별 말이 없다. 익숙한 손놀림으로 그저 묵묵히 맡은 일을 할뿐이다. 햇살에 찌푸린 눈자위 이마의 골이 그의 불편한 심기와 상심을 드러내 듯 밭이랑처럼 깊다.

▲ 마을사람들
그들이 일하는 앞쪽에서 공사중인 아파트의 중기계음이 들려온다. 아파트 건설공사가 진행중인 한쪽에서 벼농사 지을 모판일을 하는 모습이 이채롭다.

그동안 터를 이루고 살아오고 있는 자신의 집 주변의 다른 이웃집들이 계속 헐려나가고 이제는 몇 집 안 남아있다. 성복동의 농사짓는 가구는 이제 10가구가 채 되지 않는다. 8천여평의 농사일로 눈코뜰새 없이 바쁘던 시절이 언젠가 싶다.

변화하는 시대의 흐름에 그의 희망은 소박하기만 하다.

“남은 기력 다할 때까지 지금까지 해오던 일처럼 뭔가 사람으로서 할 일이 있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예전에는 노인이 제 역할을 인정받고 집안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어른으로서 대접받고 살아왔다. 나이가 들어도 내 생활은 내가 손수 꾸려간다는 생활철학이 노인들에게도 인간의 존엄성을 부여하고 자신감을 갖게 했다.

옆에서 볍씨를 고르던 마을사람 예종상씨(67)가 작업의 과정을 설명하며 한마디 거들었다.

“우리야 농사 안 짓더라도 세계 경쟁력 확보를 위해서는 최소한의 농지는 보전을 해야혀.”

토지를 갖고 있는 농부들이 대부분 개발이익으로 땅부자 되어 행복해 할 것이라 알고 있는 주변 아파트사람들의 생각과는 다르게 이들 농부들은 옛날처럼 살던 시절을 그리워했다.

“수지의 농토가 없어지면 여기서 살더라도 다른 곳에 땅을 마련해 사는 날까지 하던 농사를 지으며 살아야지 않겄어..”라고 하는 그의 말이 오래도록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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