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만주를 무대로 하여 조선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는 신민부 위원장 김혁 이하 아홉 사람이 길림에서 일본경찰서의 손에 체포되어 불일간 신의주 경찰서로 호송된다함은 이미 보도한 바와 같거니와 김혁 등 십 여명은 지난 12일 밤 열 두시 어마어마한 경계 중에 신의주 경찰서로 호송되었다는 바 목하 동서로부터 취조를 하는 중이라더라(신의주)”

1927년 당시 한 신문은 “철옹성 같은 경계 속에 신민부 김혁 중앙집행위원장 등 그 일행의 호송”소식을 크게 다루고 있다. 그만큼 당시 신민부를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김혁 검거사건은 세인들의 큰 관심대상 이었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김혁(호 오석·1875∼1939). 선생은 용인이 배출한 걸출한 독립운동가이지만 마치 전설 속의 인물처럼 자세한 활동 상이 세상에 전해져 오지 못했다. 최근 후손과 종중, 그리고 일부 학계를 중심으로 김혁 선생에 대한 재조명 작업과 선양사업이 추진되고 있는 기회를 빌어 베일 속에 가려졌던 그의 발자취를 따라가 보기로 한다. /편집자

기흥읍 농서리가 고향인 김혁 선생(이하 오석)은 1875년 10월6일 아버지 법무참사관 김태식과 어머니 윤현순 사이에서 외아들로 태어났다. 본명은 학소(學韶), 자는 순익(舜翼), 호는 오석(吾石)이다. 어린시절 그는 글공부를 용인향교에서 했다. 마침 한수 이남에서 학자로 이름이 드높았던 맹보순(동전)선생으로부터의 배움은 어떤 식으로든 그의 인생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던 듯하다.

18세 때인 1892년 3월 한국무관학교에 입학해 3년동안 군사학을 공부를 마치고 육군 보병참위로 임관, 나라를 지키는 청년장교로서의 순탄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1906년에는 어용성의 차녀 어유순과 결혼하고 다음해 장남 용기(龍基)를 낳아 행복한 가정까지 꾸렸다.

그러나 1907년 육군 참령 시절 일본에 의한 강압적인 군대 해산은 오석의 인생에 새로운 전기를 맞게 되는 계기가 됐다. 비분강개한 그는 용인으로 낙향, 청년들을 조직하여 항일투쟁에 나서는 한편 1919년 5월 독립만세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신변이 위태로워지자 일제 경찰의 눈을 피해 중국 봉천성 무송현으로 망명하고 만다. 그해 3월 하순, 당시 상해에는 여운형·이광수·서병호·현손·최창식 등이 독립임시사무소를 프랑스 조계에 두고 각국에 독립을 선언했는데 그 속에는 오석도 있었다.

이들 면면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조직하는데 참여했던 중요멤버들이었던 사실로 볼 때 오석은 망명하자마자 상당한 비중을 가진 인물로 그들 대열에 함께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러나 그는 독립임시사무소 일에 대한 관심보단 만주에서의 독립활동에 더 큰 비중을 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1919년 8월 김호 등의 동지와 수백명의 애국청년동지들을 규합하여 흥업단을 조직하고 부단장에 취임했다.

흥업단은 농민과 군인이 따로 없이 낮에는 밭을 갈고 밤에는 행군하는 ‘병농겸행’의 방법을 통해 동포사회의 안녕과 질서를 확립하는데 공헌한 단체로 알려져 있다. 그 조직은 모두 대종교인들로 구성된 것임에 비춰볼 때 오석 역시 대종교인이었음은 물론 교단 내에서 상당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되는 부분이다. 그는 이어 1920년 9월 만주 안도현 삼인방에서 이청천 등과 서로군정서를 조직하고 대일무장항쟁에 나서는 가운데 그해 10월 김좌진과 함께 청산리 싸움을 지휘했다. 여기서 잠깐 살펴볼 것이 김좌진과의 관계다.

후일 신민부를 결성해 중앙집행위원장을 맡았을 때 김좌진은 군사부 위원장이었다는 점과 신민부의 항일 투쟁을 뒷받침해 줄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했을 때 역시 오석이 교장, 김좌진이 부교장을 맡았던 사실을 볼 때 매우 가까운 동지관계이면서도 당시 김좌진을 능가하는
비중 있는 인물이었다는 것이다.

오석은 1921년 1월 소련 접경지대인 밀산현 부근에서 대한독립군단을 조직하고 군사부장으로 항일투쟁을 총지휘하고 이어 1922년 만주에서 통의부를 결성, 1924년 현천묵을 총재로 하는 대한독립군정서 조직 등 활발하고 굽힘 없는 항일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그러나 독립운동에 있어서 오석의 정점은 ‘신민부’결성이다. 북로군정서와 대종교에서 활동하면서 임시정부를 지지하고 있던 공화주의자 오석은 노선에 따른 단체별 독자 독립운동을 전개하는 현실에 크게 실망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따라 민주지역에서만이라도 통합을 이루어 대일항전에 총력을 모으자는 생각에 1925년 3월 10일 북만주 16개 지역 민선대표·10개의 국내단체 대표 등이 참가한 가운데 신민부를 조직하게 되는 것이다.

신민부는 재만 동포에 대한 자치활동과 친일한국인 암살, 국내 요원 파견을 통한 조선총독 암살 시도 등 활발한 활동을 벌여 군사·문화·행정 등 각 방면에서 많은 공적을 올린 것으로 기록돼 있다. 또 1920년대 후반 북만지역의 가장 큰 규모의 독립단체로 활동하게 된다.

오석은 바로 신민부의 모든 권력이 집중돼 있던 중앙집행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돼 실질적으로 이 단체를 움직이는 중심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신민부에서 독립군 양성을 위해 목릉현 소추풍에 성동사관학교를 설립하자 교장에 취임(부교장 김좌진)하는 등 활발히 움직이던 오석은 1927년 오전 8시경 중동선 석두하자(石頭河子)에서 신민부 총회를 개최 하던 중 경찰의 습격을 받아 유정근 등 중앙간부 10여명과 함께 체포되고 만다.

당시 국내 신문인 동아일보와 조선일보는 신민부 지도부의 검거에서부터 호송, 재판과정에 이르기까지 매우 상세하고 비중있게 이 사실을 다루고 있어 신민부의 당시 위상을 짐작케 해 준다. 1928년 6월13일 신의주 지방 법원에서 오석은 이례적으로 7년 구형보다 더 높은 10년형을 언도 받고 신의주 감옥과 평양감옥에서 7년, 서대문 감옥에서 2년 등 9년의 옥고를 치른다. 그러던 중 병환이 위독해 1936년 가출옥으로 출옥했다. 출옥 후 요양차 강원도에 가 있었으나 오랜 감옥생활에서 얻은 중병을 이기지 못하고 끝내 순국하고 마니, 1939년 4월23일의 일이다.

1962년 대한민국 건국훈장 국민장이 추서 되고 1985년 8월15일 용인 기흥읍에 ‘오석 김혁선생 독립운동 기념비’(추진위원장 이강훈)가 세워졌다.

참고 자료‥김생기, 「오석 김혁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일고찰」(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0년)/ 김종구, 「구성면지-용인향교 편」(용인문화원, 1998년)/ 오석 김혁 기념사업회 설립준비위, 「2002년도 ‘이달의 독립운동가’추천의뢰서」/ 기타 동아일보·조선일보(1928∼9년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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