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04년 12월 나폴레옹은 프랑스 황제가 됐다. 유럽을 뒤흔들었던 나폴레옹은 독일지역의 신성로마제국을 유명무실하게 만들었다. 신성로마제국 황제는 유력 가문들의 투표에 의해 선출됐다. 15세기 후반부터 강력한 합스부르크 가문이 황제를 세습했으나 그 과정은 여전히 투표에 의한 것이었다.합스부르크 가문은 독일지역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헝가리 등 당시 유럽 일대 최대 가문이었다. 혁명으로 전통질서를 파괴한 프랑스를 원상복귀시켜야 한다고 생각했던 유럽 왕실들은 나폴레옹과 전쟁을 벌였다. 그러나 군사적으로 천재라고 불리던 나폴레옹을 상대할
1270년 7월 17일 프랑스 왕 루이 9세는 1만여 명의 병사를 이끌고 북아프리카 튀니스 근처에 상륙했다. 8번째 십자군을 지휘한 루이 9세의 목적지는 이스라엘 지역이 아닌 북아프리카였다. 1248년 7번째 십자군을 이끌었던 루이 9세는 중동지역까지 장거리 원정을 하면서 어려움을 겪으며 본인마저 포로가 되는 큰 실패를 경험했다.비교적 가까운 북아프리카의 이슬람 세력을 정복해 점차 넓혀가겠다는 생각이었다. 이탈리아 남쪽 시칠리아에는 루이 9세의 동생 샤를 1세가 시칠리아 왕으로 있으면서 지원하기로 약속했고, 영국 왕 에드워드도 병력
사상 유래 없는 코로나19로 전 세계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용인시도 1년 동안 많은 노력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크고 작은 집단 발생이 지속되면서 3월 7일까지 1765명이 용인시에서 확진되고, 다른 지역에서 180명이 발견됐다. 더구나 17명이 회복되지 못했고, 아직도 투병중인 사람이 211명에 이른다.2020년은 한국사회가 전혀 경험하지 못했던 사회적 방역이라는 것을 시도하고 실천하는 한해였다. 전염병을 예방하고 감염 관리의 영역이 그동안 의료기관에만 국한됐던 것이 병원을 넘어 식당, 가게, 가정까지 확산된 것이다. 전 국민이 마
793년 6월 8일 영국 북동쪽 섬의 해안가, 원통형 투구를 쓰고 거대한 몸집에 칼과 도끼로 무장을 한 집단이 나타났다. 섬에 있던 수도원의 수도사들은 아무것도 모른 채 사나운 사람들의 재물 약탈과 수도원 파괴 피해를 봤다. 먼 바다를 건너온 바이킹 침략의 시작이었다. 바이킹은 배를 타고 갑자기 나타나서 해안가 마을들을 약탈하고 다시 바다 건너로 돌아갔다. 넓은 바다를 건너갈 길이 없던 유럽 국가들은 속수무책이었다. 바이킹이 나침반도 없던 시절 망망대해를 항해할 수 있었던 것은 아이슬란드에서 발견된 돌의 힘이었다. 일종의 나침반 역
1612년 함경도 지역에 역병이 돌았다. 처음에는 육진에서 시작해 남쪽으로 옮아가면서 심해져 죽은 자가 천 단위로 헤아렸다. 가을과 겨울이 돼도 진정되지 않았고, 전염병은 이듬해 팔도로 퍼졌다. 당시 허준은 ‘머리가 아프고 몸이 쑤시며 오한이 나 벌벌 떨고 고열이 나며, 머리·얼굴·신체가 붉게 부어올라 심하게 아프고, 온몸에 부스럼이 생기며 정신이 어지럽고 혼란스러우며 답답하면서 조급하며 헛소리를 지껄인다. 심해지면 미쳐 날뛰거나 인후에 종통이 생겨 꽉 막히게 된다’고 기록했다. 과거에 없었던 새로운 전염병으로 조선 조정에선 의약품
지중해 시칠리아 남쪽 지중해 한가운데 위치한 몰타라는 작은 섬은 유럽을 연결하는 중요한 거점이었다. 페니키아와 로마, 카르타고 등 해양 국가들의 각축장이기도 하고, 10세기 이슬람 세력이 유럽을 압박하면서 발생한 십자군전쟁 시기에는 몰타 기사단이 활약하면서 해적들을 소탕하기도 했다. 지리적 중요성으로 강대국들의 관심을 받았던 몰타는 1798년 이집트 원정에 나선 나폴레옹이 점령했다. 그러나 영국은 바로 해군 제독 넬슨을 보내 몰타를 정복하고 영토로 삼았다. 이집트의 수에즈 운하가 개통되면서 지브롤터 해협과 몰타 섬을 경유해서 홍해로
인류는 집단생활을 하면서 아픈 사람들에 대한 다양한 치료가 시도됐다. 주변 식물과 흙을 개어서 환부에 바르기도 했고, 여러 신에게 병이 났기를 기도하기도 했다. 의사의 종교적 성격이 구분되지 않았던 이유는 치료 효과가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2009년 프랑스 파리 서남쪽 한 마을에서 기원전 5000년경 매장된 유골이 발견됐다. 유골의 왼쪽 팔이 팔꿈치 아래로 일직선으로 절단돼 있는 상태였다. 엑스선 촬영 결과 절단된 뼈 내부로 회복되면서 뼈가 재생된 것이 관찰됐다. 무덤의 주인은 팔을 절단한 뒤에도 수개월에서 수년 동안 생존한 것이
중국 춘추전국시대 말기 서쪽의 진나라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동쪽 국가들을 압박하고 있었다. 기원전 262년 진나라 군사 수십만 명을 동원해 조나라를 공격했다. 조나라의 장군 염파는 성벽에 의지해서 방어하며 시간을 끌었다. 염파의 지구전은 강력한 진나라를 방어할 유일한 방법이었으나 소극적인 대응에 불만을 가진 조나라 국민들은 지휘관 교체를 건의했다. 결국 젊고 유능하다고 알려진 조괄이 새 총사령관으로 선발됐다.조괄은 매우 똑똑한 청년 장군이었으며, 군사이론으로 그를 당할 사람이 없었으나 실전 경험은 부족했다. 진나라 병력과 대치중인 장
화이자와 모더나, 아스트라제네카 등 세계 유수의 제약회사에서 코로나19 백신 개발 소식이 들려오고 있다. 코로나19 유행으로 큰 피해를 입기 시작하면서 치료 방법과 백신 개발은 전 세계의 관심사다. 감기 바이러스에 불과했던 코로나 바이러스의 변종인 코로나19는 폐렴 등의 합병증으로 진행돼 생명을 위협했다. 사망률은 독감의 10~20배에 이르고, 전파력도 강하기 때문에 일반적인 방역이 아주 어려운 상황이다. 특히 전 세계로 확산되면서 사회, 경제 전반에 걸쳐 큰 충격을 주고 있다.기침, 몸살 등 감기와 비슷한 증상으로 온 환자가 불과
황금의 섬을 찾아 서쪽으로 향했던 콜럼버스는 보물은 발견하지 못했지만 칠면조, 호박, 감자 등 여러 가지 농산물을 유럽에 전파했다. 콜럼버스가 가지고 온 여러 물품 중 카민이라는 빨간색 염색약이 있었다. 카민은 선인장에 기생하는 깍지벌레를 말려서 건조한 가루다. 유럽에서 옷감을 빨갛게 염색하는 재료로 사용됐다. 현미경으로 세포를 관찰하면 무색 투명하기 때문에 구조를 명확하게 볼 수 없다. 옷감을 염색하던 카민을 세포에 넣자 세포의 핵 부분이 빨갛게 염색돼 다른 곳과 구별이 가능해졌다. 19세기에 세포 내부의 구조를 관찰하기 위해 다
르네상스 이후 과학기술이 발전하기 시작했다. 서구 유럽은 국가 경쟁이 치열하게 벌어지면서 학문의 결과가 바로 현장에서 응용되는 환경이 조성됐다. 관념적인 이론뿐 아니라 실제 증명과 확인이 중시되고 있었다. 프랑스 대혁명과 나폴레옹 전쟁으로 국제 질서가 재편된 유럽에서는 민족 국가들이 성립되고 있었고, 소국가로 분열됐던 독일은 프로이센을 중심으로 국가 통일 작업이 시작됐다. 남부 독일에 큰 영향력을 주고 있던 프랑스와 독일의 통일을 향해가던 프로이센의 충돌은 시간문제였다. 1870년 7월 19일 나폴레옹 3세의 선전포고로 시작된 프랑
1903년 2월 2일 영국 런던 의과대학교 베일리스는 스탈링과 함께 갈색 테리어종 개의 복부를 절개해서 췌장과 소화액의 분비기전을 연구하기 위해 실험하고 있었다. 60명의 의과대학생들은 호기심 어린 눈으로 실험을 보고 있었다. 실험실의 강아지는 몇 번 움직이는 것처럼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뒤에 앉아있던 두 명의 여학생이 손을 들고 항의했다. 실험동물이 충분히 마취되지 않아 고통을 받고 있다는 것이었다. 두 여학생은 실험실에서 쫓겨났으나 얼마 후 자신이 목격한 것을 동물실험 반대 모임에 알렸다.살아있는 동물을 대상으로 하는 생체실험
에는 양귀비꽃이 피기 전에 대나무 침으로 십여 곳을 찔러 구멍을 내면 진액이 저절로 흘러나오고, 그 진액을 긁어서 햇볕에 말려 아편을 만들 수 있으며, 진통제와 설사제로 사용할 수 있다고 기록돼 있다. 아편은 환각 작용 뿐 아니라 복통, 설사에도 효과를 보이는 경우도 있었기에 고대 동·서양에서 귀중한 의약품으로 취급됐다. 마약을 의약품으로 생각했다니 현대의 기준으로 보면 놀라운 일이다.약재로 취급된 양귀비 진액을 얻는 것은 쉽지 않았다. 손으로 양비귀 하나하나에 칼로 상처를 내어 수액을 채집하는 방법은 굉장히 많은 노동력
코로나19와 어려운 경제상황으로 스트레스가 많은 요즘이다. 스트레스로 인한 위산 분비 증가로 인해 위장장애가 발생해 의료기관을 찾는 사람도 늘어나고 있다. 맵고 자극성이 강한 음식을 즐겨 찾는 한국인의 식사문화도 위장질환이 많은 원인 중 하나다. 가장 흔한 질환 중 하나인 소화기관에 대한 기록은 매우 다양하다. 그 중 찢어지듯이 아픈 통증을 만들어내는 사례는 위에서 시작되는 경우가 많다. 을 비롯한 동양의서에 위에 대한 기록을 보면, 오장육부 중 육부의 첫 번째로 위부에 대한 기록이 있다. 내경 위부의 기록을
중국 신화시대 삼황 오제중 하나인 여와와 복희는 인류를 창조하고 지혜를 가르쳐 준 신으로 묘사되고 있다. 여와(女媧)라는 이름처럼 여신으로 묘사된다. 에 의하면 하늘을 받치는 기둥 4개가 부러지면서 재난이 발생하자 여와가 하늘 구멍을 메워 수리했다고 한다. 홍수로 모든 것이 사라지자 흙을 이용해 각종 동물과 인간을 만들어 냈다. 태호 복희씨는 인간에게 지혜를 전달할 수 있는 문자를 알려줬다고 전한다. 복희의 문자방법은 끈을 묶어서 기호로 사용하는 방법이었다. 끈을 활용한 상징적 체계는 세 개를 조합해 8가지 기
속이 불편하고 가슴이 답답한 상태, 목에 무엇인가 걸린 듯한 느낌은 흔히 겪는 증상이다. 동양의학에서는 간과 위 기능의 조화가 깨지면서 위의 음식이 소화되지 않고 소장으로 넘어가는 작용이 잘 안 되는 것으로 추측했다. 습한 기운으로 몸에 진액이 흐르지 못하거나 위의 기운이 약해서 거꾸로 역류하는 것으로 생각했다. 많은 질병의 증상이 기록된 에는 위산이 목구멍까지 올라오는 증상을 탄산(呑酸)이라고 묘사했고, 신물을 토하는 것을 토산(吐酸), 가슴이 막히는 듯한 증상을 흉비(胸痺), 음식을 삼키지 못하고 금방 토하는 것을 열
‘약방의 감초’라는 말이 있다. 한약재 중 사용 빈도가 높다는 뜻이다. 감초는 콩과의 나무뿌리다. 당나라 시대 손사막의 에는 술독(술병), 고기를 먹고 생긴 중독, 식중독에 사용하는 약재로 소개되고 있다. 감초는 중국 북동부와 시베리아, 몽골에서 재배되는 약재로 에 목이 아픈 환자에게 감초를 사용한 처방이 보인다. 목이 아픈 것뿐 아니라 복통 등 다양한 증상에 감초를 사용하고 있다. 정작 한반도에는 감초가 재배되지 않았다. 삼국시대에서 고려시대까지 감초는 중국에서 수입해서 사용하는 귀중한 약재였다. 국내 최초로
기원전 203년 중국 대륙을 두고 대치 중이던 두 명이 있었다. 한나라 왕 유방과 서초패왕 항우다. 항우는 유방의 군대를 격파하며 연전연승을 거두었다. 패전을 거듭하던 유방은 퇴각해 요새에 숨어 방어에 급급했다. 험준한 요새는 공략하기 힘들었고 양측의 군대는 오랜 시간 대치를 할 수밖에 없었다. 본거지에서 멀리 떨어진 항우의 군대는 보급에 어려움을 겪게 됐다. 결국 퇴각하던 중 유방이 이끄는 한나라군에 포위됐다. 사면초가에 빠진 항우는 결국 패배했다. 전술적 기량이 항우에 비해 부족했던 유방이 승리한 이유는 여러 가지로 해석되고 있
15세기에서 18세기에 이르는 시기는 전 세계적으로 기온이 낮아지면서 자연재해가 발생했다. 혹독한 겨울과 함께 전염병이 발생할 경우 많은 희생이 뒤따랐다. 임진왜란 직후였던 조선은 특히 전염병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전염병으로 많은 인력이 희생되면서 농경활동이 어려워졌고 반복되는 홍수로 민심은 악화될 수밖에 없었다. 전쟁으로 인해 많은 의서들이 사라졌고, 백성들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선조는 허준에게 새로운 의학서적 편찬을 지시했다. 허준은 여러 의서들을 찾아서 분류해 정리한 을 1610년 완성했다. 1613년 광해군
기원전 55년 로마의 루크레티우스는 냄새가 다양한 모양의 작은 물질이 콧속의 작은 구멍에 들어가서 인지하게 된다고 생각했다. 세상을 움직이는 것은 작은 원자들로 구성돼 있다고 주장한 소위 ‘원자론’이다. 현대 과학과 비슷한 이 생각은 로마 제국이 멸망하면서 잊혀졌고, 중세에는 무신론적인 위험한 사상이라고 간주돼 금기시됐다.냄새는 인류의 역사와 함께 시작됐다. 보편적으로 좋은 향은 몸에 좋고, 불쾌한 냄새는 해롭다고 생각하며 피했다. 부패하거나 독성이 있는 경우, 자극적인 냄새가 퍼지기 때문에 당연한 생각일 수 있다. 냄새에 대한 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