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로마다 관리주체가 다르다. 고속도로, 국도, 국지도는 교통부와 광역지자체가 관리한다. 반면 도시계획도로는 시가 도시계획 사업의 일환으로 건설하고 관리하는 도로다. “용인시 예산이 엄청난데 왜 이 모양이냐”고 여기저기서 말들을 한다. 나도 때론 거든다.그런데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안타까운 현실이다. 용인시는 많은 예산이 도시기반시설을 개선하고 확충하는 데 쓰인다. 이미 도시화된 인근 지자체와는 처지와 발전단계가 다르다.가끔 기회가 있으면 용인시와 수원·성남시를 브릭스 5개국과 선진국의 차이라고 말하곤 한다. 용인시는 잠재력은 대단하나
올해 용인시 처인구 역삼동이 역북동과 삼가동으로 분리됐다. 용인의 대표적인 기관과 시설이 삼가동에 주소를 두게 됐다. 용인시청과 용인미르스타디움이다.예로부터 풍수에선 ‘땅에도 팔자가 있다’고 했다. 이를 예언지명(豫言地名)이라 한다. 삼가동도 ‘세거리’란 뜻인데 중부대로와 동백죽전대로가 만나는 지점이 삼가동이다.용인경전철 차량기지가 자리 잡아 말 그대로 ‘경전철 세거리’가 됐다. 최근엔 제2수도권외곽순환고속도로 ‘서용인IC’가 삼가동에 생겼다. 석성산과 부아산 연결 한남정맥을 경계로 물길도 갈리는 데 동남쪽으론 경안천 지류 금학천,
도시 개발, 도로 확장, 대규모 토목공사 등으로 인한 유형문화재 수난은 비단 어제오늘의 얘기가 아니다. 특히 우리고장 용인에선 흔한 일이 돼 버렸다. 마을 수몰에 따라 석탑이 옮겨진 대표적인 사례가 동도사 3층석탑이다.동도사는 처인구 이동읍 어비리 807-9번지(어진로 842)에 있다. 이동호수를 바라보는 아주 전망 좋은 절이다. 3층석탑이 원래 있던 곳은 어비리 수몰 전 금단사(金丹寺) 라는 절이었다.1963년 수몰을 피하기 위해 갈마산 아래 현 동도사 경내로 옮겨 오늘에 이른다.왼쪽 사진은 1966년 에 실렸던
길을 사전적으로 정의 하자면 사람과 사람을 이어주고 물자 이동을 연결해주는 통로다. 동서양 문명교역로였던 비단길(실크로드), 아메리카를 발견한 콜럼버스의 바닷길, 실핏줄처럼 거대한 아마존을 연결하는 강길, 세계를 하나로 연결하는 하늘 길, 시베리아 횡단열차가 달리는 철길 외에도 정보를 이어주는 통신, 문학과 예술로 표현되는 상상과 가상의 영역까지 다양하기만 하다.시공간 영역을 좁혀 우리고장을 보면 용인의 정체성을 상징하는 것 가운데 길이 있다. 길을 통해 용인을 보게 된다. 용인 역사와 지리환경 속에서 길이 갖는 의미는 무엇일까.용
경안철 상류 금학천은 처인구 삼가동에서 김량장동 술막다리에 이르는 하천 이름이다. 요즘은 하천을 따라 조성된 산책로 이용 주민이 많다.주변 경관 역시 잘 정돈된 산뜻한 모습이다. 1150호에서 다룬 바 있지만 현재 역북소공원(새마을공원)으로 조성된 곳엔 2009년 여름까지만 해도 금학로를 경계로 좌우에 주택과 상가가 밀집돼 있었다.역북소공원이 조성되면서 헐린 건물 중에는 대림빌라가 있었다. 4층 건물로 1~6동까지 호수만 해도 얼추 50가구 안팎이었다.이곳에 살던 입주민들은 경전철 노선이 생기면서 이주를 해야 했다. 일선(一善)빌딩
역세권은 예나 지금이나 그 가치가 높기 마련이다. 사람과 물자가 몰리기 때문이다. 신갈은 어디가 중심이었을까.1970년대 초반까진 신갈사거리(현 오거리)와 함께 수여선 신갈역 주변이었다고 한다. 신갈역 주변으론 물동량이 많아 화물보관소와 창고가 있었다. 대한통운에서 관리하던 창고로 현재 강남병원 주차장 주변이다.벼를 보관하거나 인근 영단방앗간에서 도정을 한 쌀을 운송하던 곳이다. 하천 다리 건너편에는 녹십자(주)가 사세를 키웠던 곳이다. 현재 기흥역사를 중심으로 아파트 단지와 상가 등 커다란 역세권이 형성돼 있다.두 사진 속에서 신
경전철을 바라보는 시선은 다양하다. 투자 대비 효과를 강조하는 경제성 측면에서 보면 현재론 회의적이다.친환경 교통수단으로서 녹색성장과 미래 지속가능성을 본다면 그 가치는 다르게 다가온다. 아무튼 경전철이란 교통수단이 새로 생기면서 주변 경관의 변화를 이끌어냈다.현재 처인구 역북소공원(새마을공원)으로 조성된 자리엔 2009년 여름까지만 해도 다수의 상가와 연립주택이 늘어선 커다란 도심형 마을이 있었다. 현재 경전철 명지대역과 김량장역 사이다. 금학천변 신성교와 용인고삼거리가 그 중심지였다.경전철 개통 직전 이 곳은 전면 철거됐다. 그
용인시 처인구 역북동은 예로부터 사실상 동부권의 중심이다.조선시대 ‘경부고속도로’ 격인 영남대로 용인 거점인 금령역이 바로 현 용인시청 인근이었다. 일본과 왕래하던 ‘조선통신사길’도 역북동을 거친다.역북동은 2021년 9월 삼가동과 분리돼 법정동 구역대로 나뉘었다. 그때부터 용인시청을 비롯한 문화복지행정타운과 용인미르스타디움은 삼가동에 속하게 됐다.하지만 여전히 역북동은 용인의 중심지 역할을 하고 있다. 역북지구라는 미니 신도시가 조성되면서 주거 및 문화소비의 중심지로 자리 잡고 있다.명지대학교, 용인소방서, 용인중앙도서관 등 주요
단 15년 사이 용인시 기흥구 신갈의 변화가 놀랍다. 용인의 서남부 관문이자 가장 번성한 고장인 신갈은 몇 차례에 걸쳐 전환기가 있었다.수여선 철길 개통이 닫혔던 신갈이 교통촌으로 떠올랐다면 도약의 시기는 1970년대다. 그 동기는 단연 경부고속도로 개통이다. 1968년 말 1차 구간인 서울-신갈 노선이 생기면서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기업들이 신갈지역에 자리 잡기 시작했다.그로부터 또 한 번의 변화를 겪게 되는 시점은 1987~1988년이다. 이때 오늘날의 도심구조를 만들게 된다. 그것이 바로 신갈토지구획정리사업지구 지정이다. 신갈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지만 그야말로 옛말이다. 하루하루 다른 용인을 실감하게 된다.기흥구 상하동(3통)은 사천 목씨(泗川 睦氏)와 곡부 공씨(曲阜 孔氏)가 오래도록 세거해 온 마을이다. 마을을 상징하는 것은 단연 고인돌(지석묘)이다.선사시대부터 오늘에 이르렀으니 귀중한 유물이자 용인의 큰 문화자산이다. 주민들은 예로부터 정성스레 ‘할미바위 고사제’를 지내왔다. 최근엔 고사라는 형식을 넘어 주민축제로 승화해 ‘문화제’ 형식으로 함께 하고 있다.보면 처인구와 경계를 이루는 효자고개와 기흥구 구갈동 강남마을 사이 42번 국도가 부자
최근 처인구 남사읍의 변화는 가장 극적이다. 2016년 9월 말 당시 남사면 인구는 7912명이었다. 5년이 지나 2021년 말 남사읍 인구는 2만3907명으로 늘었다.6년여 만에 3배가 늘어난 셈이다. 갑작스런 폭증 원인은 남사아곡지구 즉, 한숲시티 입주가 결정적이다. 7400세대가 늘었다. 인구 증가는 주변 경관은 물론 도로, 교통, 상수원시설 등 도시기반 인프라를 갖추게 되면서 전혀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한숲시티와 지척인 처인성 성역화 사업의 일환으로 처인성 역사교육관까지 완공되면서 역사문화공원과 신도시가 결합된 새로운 공동체
수여선(水驪線)은 수원-용인-여주를 잇던 협궤 철도노선이다. 일제 강점기 1930년 12월에 조선경동철도주식회사가 여주․이천 지역 쌀을 수탈하려는 목적으로 부설했다.조정래 작가는 어느 소설에서 이를 두고 ‘왜놈 발에 발동달기’라는 기막힌 표현으로 압축했다. 처인구와 기흥구 원주민 가운데 50대 이상이면 대부분 협궤열차 수여선에 얽힌 추억이 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수여선은 왜 폐선 됐을까. 물류 운송수단의 변화가 한몫했다.1971년 영동고속도로가 개통되고 여주와 수원 사이 철도 교통 수요가 급감했다. 결국 1972년 4월 1일 구
예로부터 수령이 수백 년 된 나무는 함부로 베지 않았다. 큰 바위 역시 옮길 때는 정성껏 고유제를 지냈다. 왜일까. 고목이나 거석엔 정령이 깃들여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다.영험함을 가졌기에 인간에겐 경외의 대상이었고 따라서 민간신앙의 섬김 대상이 되기도 한다. 함부로 건드린 사람이 해를 입었다는 얘기는 흔하게 전해진다.최근 용인의 명물이었던 기흥구 상하동 민재궁 마을숲 서낭당(성황당) 터가 없어졌다. 더구나 2기의 장승(천하대장군과 지하여장군)과 돌무더기도 사라지거나 파헤쳐졌다. 이유는 도로 확장으로 알려졌다.민재궁 마을입구를 오래도
주택재개발 정비사업이 제대로 마무리되는 것은 꽤 어려운 것으로 알려져 있다.용인 처인구 김량장동 일대는 몇 지역에 걸쳐 정비사업이 추진됐다. 대부분 재개발조합은 해산절차를 거쳐 사업을 접었다. 거의 유일하게 ‘용인8구역 주택재개발정비사업’이 성공적으로 진행되는 중이다.그나마도 14년이라는 끈질긴 기간을 버틴(?) 끝에 맺은 결실이다. 해당지역은 김량장동 6통에 속하며 오리골로 불려왔다. 이곳은 한 때 용인의 심장부였는데 일제강점기 언남동에서 옮겨온 행정관청이 김량장동(소학동)에 자리 잡았다. 오리골 일대다.오리골은 용인면사무소(현
10여 년 전만해도 처인구청 주변모습이 이랬다. 사진 속 오래된 건물은 정보성(복용)씨가 운영하던 정미소 건물 일부다. 정씨는 한국전쟁 이후 향토 사업가로는 크게 성공한 분이다. 주로 정미소를 운영했는데 정부미(政府米)를 전문적으로 도정했다고 한다.삼가동 화운사 주변에 용인미르스타디움이 지어지면서 주변 부지가 많이 포함됐다. 당시 수용돼 주차장으로 활용되고 있는 곳에 ‘경기농산’이란 큰 규모의 도정공장이 있었다. 바로 그 뿌리가 처인구청 앞 정미소로 알려져 있다.일제강점기에 지어진 정미소는 화재로 인해 운영을 중단한 채 상당기간 흉
용인시 처인구 마평동 용인종합운동장 부지가 조성된 것은 197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다. 1971년 시작된 ‘용인군민의 날’ 행사를 위해 마평동 논밭을 밀어 평지운동장으로 조성됐다.‘용인시민의 날’로 이어지고 있으니 50년이 막 넘었다. 그 후 관람석 공사를 거쳐 대부분의 큰 체육행사를 도맡아 치러냈다.용인에선 유일했던 종합운동장이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있다. 이미 해체 공사가 상당정도 진행된 모습이다. 삼가동 ‘용인미르스타디움’이 지어지면서 활용도가 낮아졌다는 게 이유다. 이후 청사진과 활용계획을 둘러싼 전-현직 시장 간 뜨거운 논쟁
용인은 5대 하천의 발원지에 해당하는 만큼 해발고도가 인근 도시에 비해 높다. 홍수가 나면 피해 양상이 다르다. 물길이 빠르게 지나가면서 산사태나 도로 파손 그리고 일시적 침수는 있어도 장시간 침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은 편이라 할 수 있다.용인에서도 여름 홍수나 태풍으로 인한 굵직한 피해사례가 적지 않다. 한동안 마을조사를 하면서 ‘임술년 장마’ 얘기를 가장 많이 들었다. ‘마을 어귀 큰 바위가 실은 웃동네에 있던 것인데 임술년 장마에 떠내려 왔대’ 이런 식이다.여러 기록에 따르면 일제 강점기였던 1922년에 용인을 거의 쓸다시피
용인은 경부고속도로를 따라 남으로 이어지는 ‘종축’이 도시화의 핵심이었다. 즉 서울서 최단거리 수지와 신갈IC가 있는 기흥권역을 중심으로 많은 개발과 변화 발전을 이뤄왔다. 반면 처인구는 용인시 면적의 80% 정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도 인구는 그와 반비례한다.최근 그 양상이 변하고 있다. 용인 동부권으로 일컬어지는 ‘횡축’이 급격한 변화의 시대를 맞고 있다. 신설 고속도로 2곳과 자동차 전용 우회도로 등 교통망이 늘어났다. 무엇보다 포화상태인 수지‧기흥구에 비해 아직 개발 수용 여지가 많다. 산업기반과 주거용지 수요가 급격히 처인구
용인시 기흥구 신갈동 상미마을에 있는 상미교회는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측 함남노회 소속으로 알려져 있다. 보정동 새에덴교회가 같은 쪽이다.용인에 있는 총신대와 총신대신학원이 ‘예장’ 목회자를 길러내는 신학 공부의 전당이기도 하니 지역사회와 인연이 깊다.1978년 김옥선 전도사 주도로 설립돼 오늘에 이르니 44년 역사를 지닌 상미마을의 산역사다. 교회 신축은 ‘신흥덕 롯데캐슬 공동주택 사업’이 계기가 됐다. 당초 교회 소유였던 225평이 해당 사업부지에 편입되면서 보상을 받게 됐다.현재 교회는 보상비를 신축성전에 전액 사용해 ‘빚 없는
어정은 예로부터 교통의 중심이었다. 영남대로가 지난 던 길이었다. 조선조 중기 이후 임금님의 영능(여주) 행차 때 쉬어가던 길목이었으니 꽤 중요한 지역임이 틀림없다.어숫물(어정·御井)에서 보듯 ‘임금님이 마시던 우물’이란 뜻이다. 용인을 대표하는 마을지명이다. 역시 어정사거리를 지나 메주고개를 넘어 용인으로 향했다. 현재 용인경전철 에버라인이 지나는 길 모양 그대로다.2003년경 도로(어정로) 확장공사가 막 진행 중일 때다. 동백지구 개발과 맞물려 주변은 상당히 변했는데 구불구불했던 메주고개가 곧게 펴진 것도 그 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