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란 작가의 그림을 본 순간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는 김춘수 ‘꽃’이라는 시가 떠올랐다.꽃은 꽃이라 이름 불릴 때 비로소 그 존재가 빛이 난다는 의미…. 그런데 김영란 작가의 그림을 본 사람이라면 이를 다르게 말할 수도 있겠다 싶다. “꽃이 화폭에 담겨 비로소 꽃이 됐다”고 말이다. 김 작가는 ‘들꽃 화가’로 불린다. 1990년대 초부터 줄곧 수채화로 우리 들꽃을 그려왔다. 화폭에 담은 꽃만 150여종. 그야말로 꽃 전문 화가다. 그의 자택 겸 작업실인 수수꽃
‘분청 늘림 기법’으로 전통·현대 공존 많은 미술 분야 중 우리도 모르는 사이 생활에서 늘 함께하는 분야를 꼽으라면 단연 ‘공예’다.음식을 담는 그릇부터 타일, 문손잡이 등 언제 어디서나 실용적인 공예품은 어렵지 않게 만날 수 있다. 이 가운데 임진호 작가의 작품은 돋보인다. 임 작가는 한국적인 전통성을 살리되 현대적인 감각이 공존하는 공예 작품을 만들기로 유명하다. 서로 다른 시간을 한 작품에 담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개발한 새로운 분청기법의 힘이 컸다.임 작가는 조선시대 분청기법에 대한 다양한 실
숨은 메시지 찾기그림 감상 포인트 현대는 정보가 넘쳐나는 시대다. 언제든 컴퓨터나 핸드폰을 통해 수많은 기사를 확인할 수 있다. 기사뿐인가. 책, 잡지, 텔레비전은 하루에도 수십만, 수백만 가지의 정보를 쏟아낸다. 혹자는 이를 정보의 홍수를 넘어선 슬러지(쓰레기)의 시대라고도 했다.때로 넘치는 정보들은 사실이 아닌 왜곡되고 비틀어진 모습으로 혼란을 준다. 어떤 것이 진실인지, 본질이 무엇이었는지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이다. 이렇게 혼돈의 시대를 겪고 있는 현대인들에게 타인의 시각이 아닌 자신만의 해석으
현대적 느낌의 한국화로철학적 질문 답 끌어내 ‘나는 누구일까.’인간에게 가장 원초적이면서 풀리지 않는 물음 중 하나가 이 질문일 것이다. 나는 누군가. 어디로부터 왔는가. 그 끝없는 질문을 그림에 담아온 작가가 있다. 한국화가 이보름이다.“남들이 보는 나와 내가 아는 나는 많이 다르잖아요. 내가 인식하지 못하는 나를 어떻게 화폭에 표현해야할까 수많은 고민을 했었죠.”중학교 때부터 미술을 전공했던 이 작가였다. 미술로 생각을 말하는 ‘조형언어’에 더 익숙한 그에게도 수수께끼 같은 질문의 답을 그림에 담기란 어려운 일이었다.이보름 작가
대부분 예술가들의 평생 고민 중 하나는 ‘자신만의 기법’을 찾는데 있지 않을까 싶다. 누구나 그릴 수 있고 따라할 수 있는 작품은 생명이 길지 않다. 그렇기에 끊임없이 고민하고 고뇌하며 특유의 방식을 찾아나서는 긴 여정이 예술가의 인생이 다.이경성 작가는 매 작품 발표마다 ‘완판’을 기록할 정도로 인기 있는 작가다. 그 비결이라면 떨기나무 처음사랑 시리즈, 소멸침식 기법 등 그를 정의할 그만의 정체성이 뚜렷하다는데 있다.그러나 아무나 따라할 수 없는 자신만의 작품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이 작가 역시 한동안 단 한 작품도 제대로 그
이준호 작가의 작품 앞에 서면 그 장대함에 숨이 턱 막힌다. 마치 높은 산 정상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볼 때의 느낌이다. 자연의 위대함, 넘볼 수 없는 경지를 한 눈에 담을 때의 감동이 작품 속에 고스란히 담겨 있다. 이내 정신을 가다듬고 작품을 찬찬히 훑어보고 있노라면 이번엔 피식 웃음이 난다.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호랑이, 짝을 지어 노니는 꽃사슴, 깊은 산 속에 성냥갑마냥 세워진 아파트, 하늘 저 끝을 향해 날아가는 비행기는 작가가 관객에게 선사하는 해학적 요소다. 현대와 전통을 넘나드는 화면 전개는 그의 작가 인생을 들여다보면
비 오는 날, 무심코 바라본 창밖 풍경은 왠지 모르게 늘 편안하다. 비를 피하고 있다는 안도감, 규칙적으로 들리는 빗소리가 마음의 안정을 주는 탓일까.수채화 작가 정덕문의 ‘비 오는 날에’ 시리즈는 그 느낌을 떠올리게 한다. 작가의 섬세하고 사실적인 묘사는 화폭 그대로 창밖 풍경을 보는 듯 착각하게 만드는 힘이 있다.처인구 모현면 매산리, 광주 정씨 집성촌에서 자란 정덕문 작가는 조선 후기 진경산수화의 대가로 알려진 겸재 정선의 후손이다. 정선의 산수화는 당시 밀도 높은 표현력과 아름다운 선, 미묘한 감각의 구성 등을 따라잡을 자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풍경, 자연을 담는 작가 서해창은 용인 마을 곳곳은 물론 경기도 전역을 돌며 아름다운 풍경을 화폭에 담아왔다. 한국미술협회 용인지부 전신인 용인미술인회 주역이자 1997년 용인미협 초대 지부장을 역임하며 지역 문화계에서 굵직한 역할을 해온 인물로도 유명하다. 서 작가는 특히 태성중고등학교 교사 출신이라는 특이한 이력이 있다. 30여년 근무한 태성고등학교에서는 미술부를 이끌며 지역 미술계를 대표하는 제자들을 다수 배출하기도 했다.“교사로 재직하면서 작품 활동을 한다는 게 쉽지 않아요. 주말에도 나가지 않고
나무 빨래판, 낡은 청바지, 시멘트 조각, 깨진 항아리…. 길가에서 마주치면 영락없는 쓰레기로 보일만 한 물건들일 텐데 오성만 작가를 만나면 세상 둘도 없는 예술 작품으로 변신한다.오 작가는 사람들에게는 ‘빨래판 작가’로 더 잘 알려져 있는 작가다. 세탁기가 필수 가전제품이 되면서 더 이상 쓸모없어진 나무 빨래판을 주재료로 30년 이상 작품을 만들어왔으니 별칭으로 다른 이름을 찾기는 어려울 듯하다. 그런데도 기자가 만난 오성만 작가는 ‘빨래판 작가’로 한정시키기에는 너무 많은 이야기를 하는 ‘손’을 가지고 있었다. 최근
단단하고 차갑기만 한 돌에 부드럽고 따뜻한 감성을 담기 위해 얼마나 많은 작가의 손길을 거쳐야 했을까. 이경재·박민정 작가의 작품을 보고 드는 생각은 누구나 비슷할 것 같다. 조각가 부부로 유명한 이들의 작품은 ‘부부는 닮는다’는 속설을 보기 좋게 부정해버리고 만다. 둥글둥글하고 부드러운 선으로 고향의 추억, 가족의 사랑, 인간애를 표현하는 이경재 작가와는 달리 박민정 작가는 거칠고 대담한 선으로 인간, 풍경을 통한 희망을 이야기한다. 그러나 놀랍게도 서로 다른 방향을 향할 것 같은 두 작가의 작품은 공통적으로 따뜻한 사랑, 강한
“안젤리미술관으로 지역 문화 확산 이루고파” 화가 권숙자는 이제 작가보다는 관장으로 불리는 일이 더 많아졌다. 권 작가가 20여년 간 꿈꿔왔던 공간인 처인구 이동읍 사립 안젤리미술관을 2015년 개관하면서 부터다. 2011년 착공 후 무려 3년 6개월이 지나 완성된 미술관은 구석구석 벽돌 하나까지 권 작가의 정성과 애정이 듬뿍 담겼다.“아름다운 미술 작품들을 지역에서도 언제든 감상할 수 있도록 하고 싶었어요. 사립 미술관 운영이 어렵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막상 겪는 어려움은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컸죠
- 수원대학교 미술대학원 재학- 2018 독일·한국 묵향전- 2016·2017 금보성아트센터 공모작가 선정- 2016년 홍콩 어포더블 아트페어 참가- 2012·2013 중국 상해 아트페어 완판- 대한민국서예대전 초대작가, 세계서예전북비엔날레 초대작가- 한국미협, 용인미협, 한국서협 회원 용인 문인화가 김순희 작가의 작품은 고요하다. ‘순수한 아름다움’이 꽃말인 연꽃은 수백수천 번 이뤄진 선질 작업의 은은한 배경 위에서 마치 방금 피어난 듯 아름다움을 뽐낸다. 그 그림 위에 새겨진 김 작가 특유 금문(청동기 문자)은 마치 평화로움을
‘바람이 솔솔 불어오는 사과밭. 주렁주렁 달린 빨간 열매에서 향긋한 향기가 풍겨 온다. 노랗게 물든 은행잎은 바람결에 사그락 사그락 속삭인다. 그 소리에 온갖 기교를 섞은 새소리까지 더해지면 자연이 선사하는 기가 막힌 콘서트다.’미술계에서는 풍경화가로 통하는 용인작가 신인숙 작품을 보고 있노라면 금방이라도 짐을 싸 시골로 달려가고 싶은 생각이 든다.‘녹색을 참 잘 쓰는 작가’ 신 작가는 평론가들로부터 자연에 있는 그대로의 녹색을 구현해내는 작가라는 평을 받고 있다. 작가마다 그림마다 풍기는 느낌은 다르기 마련인데 신 작가는 ‘평화로
용인시 최초이자 유일한 공예명장인 마순관 작가의 열손가락엔 지문이 없다. 매일 하루도 빠짐없이 20여년을 흙으로 그릇을 빚는 일에 매진해온 탓이다. 마 명장은 예부터 질이 좋은 백자토(백자를 빚는 흙)로 유명한 처인구 백암면에서 나고 자랐다. 어린 시절 지천에 널린 백자토를 가지고 놀면서 뭔가 만들기를 좋아했단다. 그 영향으로 군 제대 후 백암에 위치한 한국고미술자기연구소에서 백자 분야 최고 권위자인 고 한익환 선생 밑에서 본격적인 도예가 인생을 살기 시작했다. 스승의 뛰어난 점을 빼다 박은 제자로 성장한 마순관 명장은 현재 분청사
'내가 예술가임을 잊지 말라. 용기를 잃지 않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성공할 것이다. 신처럼 창조하고, 왕처럼 명령하고 노예처럼 일하라.’ - 브랑쿠시 용인 작가 김호선의 작업실에 붙어 있는 루마니아의 조각가 콘스탄신 브랑쿠시의 이 명언은 어찌 보면 김 작가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는 말이라 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그의 작가 인생은 늘 도전의 연속이었다. 사범대학 출신의 김 작가가 모든 것을 내려놓고 화실을 내 화가 생활을 시작한 것도, 미국 유학생활을 했던 것도 그의 과감함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어
제주도 출신인 김경리 작가는 뒤늦게 미술에 입문한 작가다. 쌍둥이 자녀를 키우며 점점 자신이 아닌 가족을 위한 삶에 지쳐가고 있을 때였다. 나만의 시간을 꿈꾸던 시기, 기회는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나타났다. “집 근처에 장욱진 고택이 있더라고요. 있는 줄도 몰랐어요. 우연히 옆을 지나는데 전시 현수막을 봤어요. 그리고 안으로 들어갔죠.”다른 많은 작가에게 그랬듯 김경리 작가에게도 우리나라 최초 회화작가로 알려진 장욱진 선생의 고택은 작가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는 매력적인 공간으로 다가왔다. 끌리는 대로 자꾸 가게 됐다고 했다. 그곳
특유 수채화 같은 수묵담채화로 주목 동양화 중 한국 전통적인 기법으로 그린 그림을 ‘한국화’로 지칭해 부른 역사는 생각보다 길지 않다. 한국 중국 일본 등 동양 문화권 그림을 통칭해 ‘동양화’로 부르던 것을 1982년 대한민국미술대전에서 ‘한국화’로 공식 명칭을 쓰면서부터 용어가 등장하기 시작했다. 한국화는 우리 고유 미술 분야임에도 서양화만큼 많은 사랑을 받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먹색의 간결함, 농담에 따라 느껴지는 다양한 표현들이 서양화와는 또 다른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그런 한국화를 뒤늦게 만나 대중에 알리기 위한 노력을
디자인은 사람들에게 매우 익숙한 미술 분야다. 평소 주위를 둘러보면 만날 수 있는 수많은 상품들이 모두 디자인이기 때문이다. 보기에 예쁜 걸 마다할 사람이 있을까? 대중이 가장 좋아할, 대중의 관심을 끌 수 있는 디자인은 홍보의 가장 중요한 요소일 수밖에 없다. 그런 디자인을 상품이 아닌 온전한 예술로 표현하는 용인 작가가 있다. 창조 시리즈로 이름을 알리고 있는 전덕수 작가다. 사실 전 작가는 수년 전만해도 예술가라기보다 마케팅 전문가였다.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산업디자인과를 졸업한 이후 대기업 홍보실에 입사해 15년 넘게 기업 이
서양화가 박태화는 많은 사람들에게 ‘작가’보다 ‘선생님’으로 불려왔다. 용인에서 25년 넘게 미술학원과 방과 후 수업을 통해 학생들을 가르쳐오고 있기 때문이다. 25년간 학생을 가르치면서도 작가로서 붓을 놓지 않고 꾸준히 작품 활동을 한 이유는 그의 성격 탓이다.수업이 끝난 늦은 밤이나 주말에는 자신만의 그림에 몰두했다. 누군가를 가르치는 일이 보람되고 즐거웠지만 작가로서의 끈 역시 놓고 싶지 않았다. 2013년 대학원에 도전한다고 했을 때 주위에서는 안 그래도 바쁘고 힘든데 학업까지 병행해도 되겠냐며 걱정을 했다.“정말 힘들었죠.
용인 등 도시 풍경 화폭에 담아가로등으로 희망과 행복 표현 회화 작가 중에는 유독 자연을 화폭에 담는 작가들이 많다. 산, 바다, 농촌 풍경 등 바라만 봐도 편안해지는 자연에는 인간이 흉내 낼 수 없는 아름다움이 담겨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데 자연보다 도시 모습에 매력을 느낀 용인 작가가 있다. ‘도시에서 길을 묻다’ 시리즈(이하 도시 시리즈)를 그리고 있는 김옥기 작가는 죽전 사거리 등 용인도시 풍경을 생생하게 그림으로 표현하는 화가다. 김 작가는 5년 전 우연히 도시 모습을 담기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