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 정문 연원과 배출 인물 나주(羅州) 정씨(丁氏)의 공식적 시조는 정윤종으로 알려져 있다. 정윤종(丁允宗)은 고려조에 검교대장군을 지냈다. 옛 문헌을 종합하면 丁씨의 대조(大祖)는 대양군(大陽君) 정덕성(丁德盛). 그는 당나라 사람으로 대상(大相)의 자리에 있다가 당 선종7년(신라 문성왕15년) 우리나라 압해도(押海島)로 귀양 온 후 사면되었으나 돌아가지 않고 신라에 귀화하였다. 그 자손들이 세거(世居)하게 되어 우리나라 丁씨의 연원을 이루게 되었다고 전한다.그리하여 나주 정씨는 조선 숙종과 경종 연간
정씨의 연원 정씨의 본관은 고문헌에 250여 본이라 전하나 오늘날 현존하는 본관은 광주, 동래, 하동, 연일, 초계, 청주, 온양 등 30여 본에 불과하다. 우리나라 정씨의 원조는 신라6촌 중 진지촌 촌장 대인 지백호로부터 출발해 여러 본관으로 나뉘게 됐다는 것이 통설이다. 또한 정씨의 가장 큰집은 경주 정씨라 전하며 대부분의 정씨들은 경주로부터 분적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이러한 연유로 각 본관들은 지백호 이후 언제 어떻게 분관됐는지는 상고할 수 없는 형편이나 우리나라의 모든 정씨들은 지백호로부터 시작됐다
청송 심씨의 시원-고려조 심홍부고문헌에 전하는 심씨 본관은 에 63본, 에 70본으로 나타나 있지만 이는 지파의 거주지 중심 이야기로 보인다. 현재 알려진 심씨 본관은 청송, 부유(순천), 삼척, 풍산, 의령, 전주 등 6본이며 이들 중 대표적인 심씨는 청송(靑松) 심씨(沈氏)이다.본관 청송은 경상북도 동부와 중부에 위치한 군의 지명이며, 청송 심씨 1세조는 고려에서 위위시승(衛尉侍丞: 궁중관계 의식용의 물건을 담당하던 종6품 벼슬)을 역임한 심홍부(沈洪孚)이다. 선계는 알려지지 않았다. 2세 연(淵)
공씨의 기원우리말과 글로 공씨는 두 성이 있는데 한 성은 공(孔)씨, 다른 한성은 공(公)씨이다. 후자의 공(公)씨는 김포 공씨로서 희성이기는 하나 김포에 대대로 세거해온 성씨이다. 전자의 공(孔)씨의 본관지는 중국 산동성에 있는 곡부(曲阜)이며 세계 4대 성인 중 한분인 공자를 시조로 하고 있는 성씨이다. 공자의 후손들은 세계 각지에 흩어져 그 수가 400여만 명에 이른다고 한다.우리나라 공씨는 1351년(충정왕 3년) 시조로부터 53대손인 소(紹)공이 원나라 한림학사(정4품관직)로서 공민왕과 결혼한 노국대장공주와 함께 고려에 왔
인천 이씨의 연원인천 이씨는 허씨로부터 연유하고 있다. 허씨는 가야국 김수로왕의 부인이 허씨인데 둘 사이에서 큰아들은 김씨 성을 이어받고, 둘째 아들은 어머니 성인 허씨 성을 이어받았다 한다. 이 허씨의 후손 중에 허기(허황후의 23세손)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사람이 당에서 이씨 성을 사성(왕이 내리는 성) 받아 인천 이씨의 시조가 됐다고 한다.인천 이씨의 유래는 허기(許奇)라는 사람이 신라 때 하찬(신라 17관등 중 6번째 관등) 벼슬을 할 때 사신으로 당나라에 갔다 한다. 때마침 당나라에 안록산의 난이 일어나 당 현종이 촉나라
연안 이문의 뿌리우리나라에는 300여 성씨가 있는데 과거에 명문거족 하면 달서(달성 서씨), 광김(광산 김씨), 연이(연안 이씨)씨를 3대 명문가문으로 꼽는다. 이들 중 연안 이씨는 조선 초기부터 용인에 뿌리를 내리며 600여 년간 모현, 양지, 이동을 중심으로 세거해오고 있다.연안 이씨의 본관지는 지금의 황해도 연백군의 옛 지명이다. 지명 변천을 보면 고구려시대 염시성, 신라시대 해고군으로 불리다가 고려 충선왕 때(1310년) 행정구역 개편으로 연안이라 부르기 시작한 지명이다. 그 후 1895년 연안군이 됐다가 1914년 행정구역
고려에 포산 곽문을 열다 곽씨는 중국에 뿌리를 두고 있는 성씨이다. 주(周) 문왕의 아우 괵중이 있었는데 괵(㶁)이 곽(郭)과 음이 비슷해 곽공(郭公)이라 불렀기 때문에 성을 곽이라 했다고 하며, 곽공의 후손이 우리나라에 귀화해 정착함에 따라 곽씨가 번성하게 된다.우리나라 곽씨의 본관은 현풍, 선산, 청주, 해미, 여미, 봉산 등 여러 본이 있다. 그러나 청주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현풍 곽씨의 분파이므로 합본돼 현재는 현풍과, 청주 두 본 뿐이다. 2000년 인구조사 통계에 의하면 곽씨 인구는 19만여 명으로 인구 순위로는 37위
상주 황씨의 근원우리나라 황씨는 160여 본이 있다고 전해지고 있으나 평해, 장수, 창원, 상주 항주 등 10여 본이 황씨의 주를 이루고 있다. 여러 본의 황씨들의 도시조는 황락이라 하며 황락은 중국 후한의 유신이었다 한다.황락과 구대림(평해 구씨의 시조)이 함께 후한에서 지금의 베트남지역에 사신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 평해(平海)에 안착해 살았다 하며 이때가 서기 28년 신라 유리왕 5년이다. 표류해 온 황락이 평해에 살게 됨으로써 사람들은 황락을 황장군이라 불렀다고 하며 그가 우리나라 황씨의 시원이라 한다.지금도 경북
어(魚)씨는 20여 본이 있었다고 전한다. 하지만 현재는 명나라에서 난을 피해 우리나라에 들어와 함경도 경흥에 살면서 이씨에서 어씨로 사성을 받은 어계복을 시조로 하는 경흥 어씨, 고려 태조 때 얼굴이 기이하고 겨드랑이에 비늘이 있는 지씨 성을 갖은 사람이 있었는데 태조가 이를 듣고 친히 불러 비늘을 보고 어(魚)씨 성을 하사했다는 충주 어씨가 있다.그리고 남송 때 고려에 귀화해 강릉에 살다가 평안도 함종으로 이거해 살던 어화인을 시조로 하는 함종 어씨가 있다. 현재 알려진 성을 같이하면서 본관을 달리하는 세 어씨 중 함종 어씨가
사천 목씨의 유래사천 목씨의 유래목씨는 타 성씨들과 달리 사천 단본이다. 목씨의 유래는 여러 설이 전해지고 있다. 먼저 인터넷 위키백과에 따르면 백제의 왕족인 부여씨를 비롯해 백제의 8대 귀족성씨인 목(木)씨, 해(解)씨, 사(沙)씨 등이 있었는데 백제 멸망 후 부여씨는 부여 서(徐)씨, 의령 여(余)씨로 변성되고 목(木)씨는 목(睦)씨로 변성됐다 한다.이 후 고려시대 이전까지 계대가 분명치 않다가 고려 고종 때 목효기가 정계에 등장하면서 후손들은 효기를 시조로 하는 사천 목씨가 됐다 한다.다른 유래로 고구려 때 중국과 문화교류를
이순유를 시조로 하는 성주 이씨(星州 李氏)는 전국적으로 약 19만명이 있으며 본관은 경북 성주이다. 시조 이순유의 또 다른 이름은 이극신(李克臣)으로 신라말기의 문신이다.그는 신라에서 이부상서를 거쳐 재상까지 올랐으나 935년(신라 경순왕 8년) 고려에 항복하자 동생 이돈유와 함께 관직을 사퇴한 후 두문불출하였다고 전해진다. 마의태자와 함께 신라 천년사직을 보전하려 한 충신이었다. 고려 태조 왕건이 공에게 벼슬을 여러 차례 권유하였으나 따르지 않자, 신라 재상들을 여러 지방에 있게 하는 정책 차원에서 지금의 성주(과거엔 경산 또는
우리나라의 소씨소씨는 우리로 표현할 때 소(邵)자를 쓰는 성씨와 소(蘇)자를 쓰는 두 성씨가 있다. 소(邵)씨는 고려 명종(1170-1197)조 때 경상도 안찰사를 역임한 소광빈을 시조로 하는데 본관은 평산이며 2000년 인구통계에 의하면 725명뿐인 희성으로 용인에는 집성촌이 존재하지 않는다.이번에 살펴보고자 하는 성씨는 진주 소씨(晋州蘇氏)로 족보상 연원을 보면 고대 중국의 요, 순시대에 뿌리를 두고 있다고 하며 후손 가운데 한 줄기가 한반도로 들어와 우리나라 소씨가 됐다고 한다.이후 세월이 흘러 경주 인근에서 6부 촌장들이 박
한산 이씨는 호장공 이윤경을 시조로 하는 한산 이씨와 이윤우를 시조로 하는 권지공계로 나뉜다.권지공계는 고려조 이무를 비롯해 여러 인물을 배출했으나 조선에 들어와서는 크게 번성하지 못한 관계로 한산 이씨는 호장공계가 주를 이루고 있다.한산 이씨의 관향인 한산은 현재 충청남도 서산군에 속해있는 지역으로 한산모시, 한산소곡주로 잘 알려진 곳이다.한산 이씨는 고려말에 명문가로 발전하기 시작해 조선시대 사육신의 한사람인 이개와 요즘 방영되는 ‘징비록’에 등장하는 이산해, 토정비결의 저자로 유명한 토정 이지함, 그리고 20세기 들어와 풍자와
박씨의 원류 박씨는 모두 신라시조 박혁거세를 시조로 하고 있으며 박혁거세가 박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박씨라 했다고 한다. 박씨의 본관은 300여 본이라 전해지고 있으나 현재 관적이 분명히 밝혀진 박씨는 70여 본에 불과하다.우리나라의 많은 성씨가 중국에 뿌리가 있다고 하고 여진이나 몽골, 일본이나 멀리 아랍계 외래 성씨까지 있으나 박씨만은 순수한 한민족의 혈통임을 자랑하고 있다. 다만 17세기에 네덜란드 사람으로 풍랑을 만나 우리나라에 귀화한 박연은 우리나라 여인과 혼인해 1남1녀를 두었는데 그 후손들의 자취가 없고, 일본에서 귀화
수원 백씨의 본관 유래 수원 백씨의 시조는 신라 때 당나라에서 귀화한 백우경(호는 송계)이다. 시조 이후 계대가 실전돼 신라 말 고려 초 인물이며 상장군에 증직된 백창직을 중시조로 해서 세계를 이어오고 있다.백씨의 본관 유래를 보면 수원 백씨의 중시조인 창직(경명왕 때 중랑장 역임)의 증손 휘가 대사마대장군으로 수원군에 봉해짐으로서 본관을 수원으로 했다는 설과 창목의 9세손 천장이 원나라에서 이부상서, 우승상으로 수성백에 봉해지고 고려에 와서 수원백에 봉해져 수원을 본관으로 했다는 두 가지 설이 있다.현재 본관인 수원은 단본이다.
관향 순흥은 현재 경상북도 영주시에 딸린 면이지만 예전에는 도호부가 설치돼 있을 정도로 큰 고을이었다. 고려 말 유학자 안향 선생 고향이고, 조선 초 ‘단종복위운동’에 가담했던 소위 금성대군 역모사건의 무대이기도 하다. 이때 순흥은 남자들의 씨가 마를 정도로 혹독한 조정의 보복이 있었고 도호부가 폐지되기에 이른다. 200여년이 훨씬 지나 다시 고을이 설치됐으니 당시 피해가 어느 정도였는지 짐작이 간다.당시 금성대군과 의기투합했던 순흥부사가 이보흠인데 바로 양지면 남곡리에 재실이 있는 고려말 은사(隱士) 이석지 손자로 용인사람이라 할
진천 송문의 근원 진천 송씨의 관향은 충청북도 진천이다. 진천은 고구려 때 금물로군, 신라 때 흑양군, 황양군, 고려 때 강주·창의 등으로 불리다가 조선조에 들어와 상산이라 했다. 조선 태종 13년 행정구역 개편 때 진천이라 개명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진천 송씨의 시조는 송순공으로 신라 49대 헌강왕(재위 875~886) 때 대아찬(17등급 중 5번째 등급)을 역임한 인물이다. 그러나 시조 이후 계대가 실전(묘지나 고적 등 전해 오던 사실을 알 수 없게 됨)돼 350여년 이후 고려 때 송인을 1세조로 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송인은
한양에서 벼슬하던 이원수의 꿈에 청룡과 황룡이 몸을 휘감자 이는 길한 태몽이라 생각하고 휴가를 내어 부인이 살고 있는 강릉으로 가게 됐다. 강릉으로 가는 도중 대관령을 넘을 때 날이 저물어 주막에 유숙하니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보고 주인 여자가 유혹하자 태몽이 생각난 이원수가 유혹을 뿌리치고 강릉으로 돌아가 아이를 잉태시켰고 한다. 돌아오는 길에 미안한 마음으로 그 주막을 들렸는데 그 여자는 간데없고 다른 여인이 주인이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이때 잉태된 아이가 바로 조선시대 유학의 거목 율곡 이이(1536-1584)이다.율곡은
양천 허씨의 연원사람들의 이름은 성을 제외하면 보통 두 글자로 이뤄져 있다. 두 글자 중 하나는 혈통을 표시하는 돌림자이고 다른 한 글자는 자신의 이름이다. 그러나 양천 허문의 이름은 주로 외자 즉, 허준, 허균 등 외자를 전통적으로 사용하고 있다. 돌림자는 한자의 변으로 표시한다. 외자를 사용하는 연유는 왕가의 이름이 주로 외자이며, 양천 허씨 또한 가락국의 왕손이므로 외자를 쓰고 있다고 한다.허씨의 연원은 가락국 왕계(王系) 혈통인 김씨로부터 시작됐다고 전해진다. 아주 옛날에 가락국의 김수로 왕(김해 김씨의 시조)이 인도 아유타
우리나라의 진씨진씨는 희성이나 우리나라 역사에 많은 공헌을 한 성씨 중 하나이다. 진씨는 한자로 진(秦)자를 사용하는 전주, 풍기 진씨가 있고, 진(晉)자를 사용하는 남원 진씨, 진(眞)자를 사용하는 서산 진씨. 진씨 중 가장 번성한 베풀 진(陳)자를 쓰는 성씨가 있다. 성씨를 본관별로 분류해보면 명나라 태조로부터 문열이라는 시호를 받은 진보재의 손자 진리(陳理)를 시조로 하는 양산 진씨, 정유재란 때 명나라 원군으로 조선으로 건너와 귀화한 진린(陳璘)을 시조로 하는 광동 진씨가 있다. 또 송나라 때 복주 출신 진수가 우윤 벼슬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