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혁명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년을 맞아 올 2월 11일부터 5개월 동안 연재한 코너를 20회로 마치려 한다. ‘한말 최초 순국 이한응의 114년 전 일기와 편지’를 시작으로 민영환 순국지사, 임옥여·정주원 등 용인의병들, 3·1만세운동에 관한 일제 경찰의 기록들을 소개했다. 또한 용인 출신으로 만세운동에 참여했다가 독립전선에 뛰어든 신민부 중앙집행위원장인 김혁 장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경기도의원인 오의선 의사, 의열단의 남정각 지사와 신흥무관학교 교장인 여준 선생과 그의 제자이자 독립전쟁
서로군정서(부독판 여준) 중대장으로 청산리·봉오동 전투를 승전으로 이끈 오광선은 1933년 임시정부 김구 주석의 요청에 따라 산해관을 넘어 낙양의 군관학교 교관으로 초빙됐다. 이어 밀명을 받아 일본군 점령 하의 북경으로 밀파돼 금은방을 차리며 비밀공작에 종사했다. 하지만 곧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됐고, 1937년 11월 신의주 형무소에 수감되고 말았다.오광선의 체포 소식을 들은 남경의 임시정부 지도부와 가족들은 그가 처형당했을 것으로 여겼다. 임정 요인들은 부인 정정산과 희영(1925년생)·희옥(1927년생) 자매, 그리고 유복자인
시인 류완희는 1901년 용인 내사면(현 처인구 양지면) 송문리 429-1번지에서 태어났다. 양지공립보통학교를 4회로 졸업한 후 경성제1고등보통학교(현 경기고등학교)에 이어 경성법학전문학교(현 서울대) 법대에 진학했다. 행정법과 정치학을 전공했지만, 많은 시간 문학도서 탐독으로 보냈다고 한다.1923년 3월 20일 본과를 1회로 졸업한 류완희는 법률가가 되라는 주위의 권고를 뿌리치고 경성일보의 편집부 겸 학예부 기자로 입사했다. 이후 그는 동아일보와 시대일보, 중외일보 등에서 당대 사회의 모순과 불합리성을 파헤치는 기사를 쓰는 한편
대한민국에는 200여 종합대학이 있고, 용인시에만 9개 대학이 있다. 하지만 독립운동가가 설립해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독립운동사를 정규강좌로 가르치는 대학은 용인의 단국대학이 유일하다. 단국대학을 설립한 범정 장형 선생은 1889년 1월 18일 평안북도 용천에서 태어났다. 9살까지 한학을 공부한 그는 1908년 서울로 올라와 보성전문학교 법과에 입학했다. 학창시절 그는 설립자 이용익을 비롯해 안창호와 손병희 선생에게 강한 영향을 받았다. 1909년 일제의 국권침탈로 단 한 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지 못하는 사태가 벌어지자, 장형도 학업
호국·보훈의 달 6월에 용인시 문화예술원에서는 용인시민 소장 문화재전과 독립운동 자료전시회가 열리고 있다. 이한응·민영환·오광선 등 용인에서 배출한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들의 손때가 묻은 귀중한 유품과 생생한 역사자료를 만날 수 있는 귀중한 기회이다. 이 중 용인 태생의 민족시인이지만, 현재 화성시 동탄면에 자리한 문학관에서 보관 중인 홍사용의 유품도 만날 수 있다. 암울한 일제 침략 시기 눈물과 순우리말로 민족적 울분을 쏟아내며 저항한 시인 노작 홍사용이 태어난 곳은 오늘날 삼성반도체 공장이 자리한 용인 기흥구 농서동 151번지, 이
용인 처인구 모현읍 능원리는 한국 성리학의 시조이자 충신의 상징인 포은 정몽주 선생이 모셔져 있지만, 그 옆 종산에 독립운동가가 묻혀 있음을 아는 이는 많지 않다. 바로 포은의 24대 종손인 고철 정철수이다. 그는 1922년 포은 후손들의 수백 년 집성촌인 능원리에서 태어나 1930년 모현공립보통학교를 졸업했다. 이어 수원보통학교 2년을 다닌 후 1942년 현 고려대학교인 보성전문학교 상업과에 입학해 법학을 공부했다.재학 도중 결혼해 뱃속 아이까지 있었건만,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는 정철수와 같은 4385명의 청년들을 군대로 끌고
스승의 은혜가 그리운 오월, 용인의 큰 스승 여준 선생을 떠오르게 된다. 여준(呂準) 선생은 1862년 용인 원삼면 죽릉리에서 태어났다. 외가인 해주오씨 가문의 한학을 배운 그는 20살 과거에 급제해 서울 회현동 종형 여규형의 집에서 공부했다. 이 무렵 저동(지금의 명동) 일대 삼한갑족으로 유명한 이회영·시영 형제와 그의 종친 이상설과 죽마고우로 지내며 신학문을 익혔다. 그가 24살 무렵인 1885년 이회영·시영 형제와 이상설 등은 8개월 동안 신흥사란 절에서 합숙하면서 영어와 법학, 수학 등 신학문을 공부했다.1904년 일본이 러
가정의 달 5월, 일제의 침략과 그에 맞선 3·1혁명은 단란했던 대한의 모든 가정을 뒤흔들어 놓았다. 독립지사를 배출한 모든 가문에는 어른과 남편, 자식을 일본군에게 잃을지 모른다는 긴장과 매 끼니를 걱정해야 하는 가난 속에서도 끊임없이 뒷바라지해야 했던 숱한 아내와 어머니들이 있었다. 용인 처인구 이동읍 화산리 출신의 정정산은 3대에 걸쳐 독립지사를 배출한 대표적인 민족의 어머니가 아닐 수 없다.그녀는 14세 어린 나이에 이웃 마을인 원삼면 죽릉리의 17세 소년 오광선과 결혼을 하게 됐다. 신혼 때부터 그녀는 포수로 의병에 참전하
올해 4월은 피 어린 3·1혁명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세워진 지 100년이 됐지만, 11월이면 총과 폭탄으로 나라를 되찾으려 한 의열단이 창단된 지 100년이 된다. 행정조직을 통해 새로운 나라를 세우는 일도 중요하지만, 강도 일본에게 빼앗긴 나라를 총과 폭탄으로 맞서 싸운 의열단원들의 피눈물을 기억하지 못한다면 독립전쟁은 공허한 메아리에 그칠 수 있다. 히틀러 같은 제국주의자 1명을 죽여 동포 100만을 살리려 불나방처럼 싸운 의열단원 중 용인 모현읍 출신 남정각(南廷珏, 1897.12.22~1967.1.29)이 있다.처인구 모
1919년 4월 11일 대한민국으로 국호를 바꾼 임시정부는 4월 30일 오늘날의 국회에 해당하는 의정원 첫 회의를 가졌다. 용인 출신으로서 경기도를 대표한 임시의정원은 오의선(이명 희선, 于丹宇·禹丹宇)이다. 오의선은 1889년 용인군 원삼면 죽릉리 669에서 태어났다. 이명으로 오희선과 우단우 등이 확인되는데 호적등본에는 오의선으로 나온다. 서울 보성전문학교를 졸업한 후 30세의 늦은 나이에 제국의 심장부인 도쿄로 유학길을 떠났다. 1918~1920년에 작성된 조선총독부와 일본 내무성 보고자료인 『조선인개항』에 의하면, 오의선은
1919년 3월 독립만세의 거대한 함성 바다를 일군 용인의 봄날은 잔인하게 눈부셨다. 만세함성에 놀란 일제는 시위가 잦아들자 잔혹한 보복에 나섰다. 각 동리를 돌며 마구잡이로 체포해 헌병대 지소로 연행했고, 혹독한 심문과 고문을 가했다. 전국의 헌병지소와 경찰서가 곧 지옥 같은 고문현장이 됐고, 저항자와 주동자들은 악명 높은 서대문형무소에 수감됐다. 용인의 만세운동으로 현재 서대문형무소 수형카드로 확인되는 이는 권종목·정규복·홍종욱·홍종엽·이덕균·한영규·김운식 등이다. 3월 28일 포곡면 삼계리 도사마을에
1919년 3월 24일 김량장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용인의 만세운동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3월 28일 아침부터 용인의 북부 모현면 왕산리와 초부리에서는 김명화·김동호 등이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를 부르며 읍내로 향했다. 조선헌병대사령부에서 4월 말 집계한 에 의하면, 이날 용인 모현면 왕산리 시위에 400여 명이 참가했고, 8명이 검거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용인 만세운동 검거자 재판기록을 종합해 보면, 포곡읍 삼계리에서 농사를 짓던 68세 할아버지 김병선은 오전 7시경 태극기를 들고 대열을 이
1919년 3월 24일 김량장공립보통학교 학생들의 만세시위를 시작으로 용인의 만세운동은 봇물처럼 터져 나왔다. 3월 28일 아침부터 용인의 북부 모현면 왕산리와 초부리에서는 김명화·김동호 등이 시위대를 이끌고 만세를 부르며 읍내로 향했다. 조선헌병대사령부에서 4월 말 집계한 에 의하면, 이날 용인 모현면 왕산리 시위에 400여 명이 참가했고, 8명이 검거된 것으로 기록돼 있다. 용인 만세운동 검거자 재판기록을 종합해 보면, 포곡읍 삼계리에서 농사를 짓던 68세 할아버지 김병선은 오전 7
전 세계를 놀라게 한 대한독립 만세시위가 처음 용인지역에서 울려 퍼진 때는 언제일까? 100년이 지난 오늘 관련 사료를 찾아 역사의 진실을 되찾고자 하니 그동안 후손들의 무관심과 게으름이 부끄러울 따름이다.“(3월)12일 경기도(용인군 기흥면) 금화(金華), 충청남도 온양 각지에서 50명에서 1천명의 군중이 일어났으나 별일 없이 해산시킴” 1919년 3월 13일 조선헌병대사령관 고지마 소우지로가 도쿄의 다나카 기이치 육군대신에게 타전한 긴급 전보(국가편찬위원회 소장)는 12일 용인 최초의 만세시위 움직임이 있었음을 암시해 주고 있다
2019년에도 대단한 인기지만, 120년 전 대한제국기에도 공직자가 된다는 건 가문의 영광이자 출세의 지름길이었다. 하지만 나라가 망해가는 마당에 자신의 관직만 올라간다는 건 글 배운 이의 수치가 아닐 수 없다. 국록을 먹는 공직자 중 국란을 맞아 의병장이 된 용인인으로 임옥여를 꼽을 수 있다.임옥여는 본명이 경재로 1872년 용인 양지군 평창리 평촌(坪村)에서 무장의 집안에서 태어났다. 대한제국 10년인 1906년 1월 25일자 관보에 의하면, 임경재는 ‘외국어학교 부교관서차임관 8급’에 임명됐는데, 이듬해 농상공부주사로 전근한
1896년 4월 1일 고종황제의 특명전권공사로 민영환은 인천항에서 러시아 함대에 올랐다. 윤치호와 김득련·김도일·손희영을 수행비서로 삼았고 통역으로 스테인을 대동했다. 명성황후가 잔혹하게 시해당하는 국치를 뒤로한 채 인천을 떠난 일행은 중국 상해와 일본 도쿄를 거쳐 태평양을 건너 미국 뉴욕의 번화가를 방문했다. 이어 대서양을 건너 영국과 아일랜드․네덜란드․독일․폴란드를 거쳐 러시아 경내로 들어갔다.민영환 일행은 거대한 군사기지와 번화한 문화도시인 뉴욕·런던·파리를 방문해 큰 충격을 받았다. 또한 열강
올해는 죽음을 무릅쓰고 독립만세를 부른 3·1운동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세운 지 100년이 된다. ‘시위를 넘어 혁명으로’ 그리고 ‘황제의 나라에서 백성의 나라’로 바꾸는 거대한 역사의 물결에 용인 선조들도 1만3200명 이상 참여해 숱한 피눈물을 흘렸다. 임시정부 경기도 의원을 비롯해 만주 독립군, 의열단원, 광복군 등으로 항일전쟁에 나섰다. 이에 본지는 100년 전 선조들의 뜨거운 투쟁 의지와 애향정신이 담긴 유품과 역사자료 등을 통해 독립운동을 체험하는 시간여행을 갖고자 한다. 독립지사들의 피어린 항쟁과 이를 탄압하려는 일본